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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리는 것들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등록일 2017년09월05일 16시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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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나라가 어지러울 때면, 사문난적(斯文亂賊·가짜 글로 세상을 어지럽힘) 혹세무민(惑世誣民·세상을 속임), 이른바 도참설(圖讖說·음양오행으로 길흉화복을 예언함)이 위세를 부립니다. 사람들의 불안한 기대와 욕망이 그런 미신을 부릅니다. 오늘 자 한 조간신문에서도 그런 글을 봤습니다. ‘후천개벽과 음(陰)의 시대’라는 말을 어디에선가 가져와서는 차기 대권을 실물 여자인 박근혜 후보가 잡을 것인지 아니면 성씨에 계집 여(女)가 들어가는 안(安)철수 교수가 잡을 것인지 두고 보자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여론조사도 나와 있는데 그 정도도 못 볼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런 ‘뻔한 말’을 신문에 내는 소이를 잘 모르겠습니다). 조선조 개국 시점에 ‘나무 목(木)’이 성씨에 들어가는 이가 임금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 시중에 돌았었다는 이야기의 재탕입니다. 그런데 논리가 좀 박(薄)합니다. 노는 물이 얕습니다. 기왕에 말을 만들려면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깊은 물에서 물장구를 쳐야 되지 않을까요? ‘문(文)이 사실은 계집 여(女)인데 천기(天機)를 감추려고 꼭짓점 하나를 비틀어 감쪽같이 비보(裨補·부족한 부분을 보충함), 몸을 숨기고, 다가올 용상봉무(龍翔鳳舞·크고 화려하게 등장함)의 때를 기다리는 형국이다’라는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자칭 도사라면서 꽤나 궁색한 말본새입니다.”

5년 전 제가 페이스북에 실었던 내용입니다. 그날 아침의 조간신문에 난 한 칼럼을 보고 쓴 글입니다. 페이스북이 ‘과거의 오늘’이라고 이름을 붙여 옛날 포스팅을 다시 보여주는군요. 읽어 보니 재미있습니다. 마치 제가 한 예언께나 하는 도사가 된 듯한 헛기분도 듭니다. 물론 농담입니다. 본디 진정한 예언들은 <원인-결과>를 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후천개벽과 음의 시대’이므로 여성성이 득세하고 그 여성성의 징조를 실물과 성씨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말본새는 그러니까 진짜 예언 축에는 전혀 끼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고작해야 ‘재미로 보는 오늘의 운세’ 정도에 해당되는 것이겠지요. 그런 재미로 해보는 운세 풀이의 핵심은 자유연상(自由聯想·free association)과 확충(擴充·amplification)입니다. 인간의 무의식을 탐구하는 심층심리학에서 자주 쓰는 말들입니다. 의식의 통제 없이 자유롭게 생각나는 대로 떠올려보고, 이것저것 갖다 붙일 수 있는 것은 다 갖다 붙여 본 연후에 맥락적으로 의미 있게 여겨지는 것들을 한 데 이어서 세상에(피분석자에) 유효한 ‘문법적인 문장’을 만드는 것입니다. 비문법적으로 나열된 것들을 재배치해서 문법에 맞도록 배열하는 기준은 전적으로 분석자의 주관입니다. 위의 경우는 ‘후천개벽과 음의 시대’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자신의 주관을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공인을 받고 있는 거대담론을 빌려서 그렇게 합리화합니다.

요즘 정가에서 ‘생활 보수’라는 말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사람들이 많이 재미있어 합니다. 고위공직자로 낙점된 분의 과거 행적과 소신을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으니 그렇게 그분을 엄호한 모양입니다. 이 말 역시 일종의 ‘확충’의 결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 효용은 ‘재미로 보는 오늘의 운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보내야 할 내용입니다. 한 거물급 야당인사가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다’라는 격언을 패러디해서 “(이번 정권에서는) 인사가 망사(亡事)다”라고 조롱했습니다. 잘 되는 집안의 ‘확충’에는 변치 않는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를 죽이는 일’이 그것입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자기합리화의 욕망을 단칼에 끊어내는 자기 부정이 진정한 확충의 요체입니다. 모든 현명한 지도자들은 누구나 그런 자기 정화의 지도력을 구비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선한 지도자라도 선한 자를 널리 구해서 곁에 두는 일에 진력하지 않는다면 종내에는 실패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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