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경’에 묻힌 권력투쟁 피비린내와 소헌왕후의 눈물
이후 찬경루는 김종직, 서거정, 송시열 같은 대가들이 앞다투어 시를 짓거나 기문을 썼다. 누각 안에는 이외에도 이심원, 홍성미, 황효원, 한광근, 양극선, 신익선 등의 시편이 걸려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서거정 김종직 이심원의 시가 소개되고 있다.
온 종일 한가롭게 시 읊으며 기둥에 기대니,
선현들의 싯구가 모두 노조린을 앞서는 구나.
두 산이 좁게 뻗쳤기에 땅 없을까 의심했더니,
한 가닥 오솔길이 가만히 조그맣게 있는 동천(洞天)으로 통하였네.
청부(靑鳧)를 찾고자 하나 이제는 볼 수 없는데,
한가롭게 백조를 보니 참으로 사랑할 만하다.
이곳에도 반드시 봉래산이 있을 것이니,
단구가 아니더라도 신선이 되어 갈 수 있으리라.
-서거정의 시 ‘찬경루’
찬경루에는 비밀코드가 숨겨져 있다. 권력투쟁의 피비린내는 ‘찬경’에 묻혔다. 소헌왕후의 인생곡절이 녹아 있다. 권력투쟁의 음모와 음모에 숨죽이며 울음을 삶켜야 했던 조선 여인의 한이 배어 있다.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沈溫·1375~1418)은 영문도 모른 채 역적으로 몰려 죽었다. 사정은 이렇다. 1418년 9월 2일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세종의 장인인 심온을 영의정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날 심온은 영의정에 올랐다. 영의정에 임명된 심온은 다음날 명나라에 사은사로 떠나게 된다. 그가 떠날 때 사대부들이 앞다퉈 전송했다. 새로운 권력자에게 줄을 대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수레와 말이 도성을 뒤덮을 정도였다. 이 소문을 들은 태종은 다시 외척이 득세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자신이 죽인 처남 민무구나 민무질을 떠올렸다. 왕실의 앞날을 위해 대책을 세워야 했다.
태종은 ‘강상인옥사’에 심온을 엮어넣기로 했다. 태종은 세종에게 양위하면서 군대는 자신이 맡고 국가 중대사에도 자신이 개입하기로 했다. 그런데 태종의 심복인 강상인이 군사문제를 세종에게 직접 보고했다. 태종은 ‘태종과 세종을 이간시키려 했다’는 죄목을 걸어 강상인을 찢어 죽였다.
태종은 심온의 동생 심정이 병조의 군부에 있다는 점에 착안해 심정과 강상인을 연루시키고 다시 심정과 심온을 연결시켜 심온을 강상인 사건의 주모자로 만들었다. 여러 사람이 고문을 당하고 허위자백을 강요받았고 죽었다. 그해 12월 5일 명나라에서 돌아온 심온은 의주에서 영문도 모른 채 체포돼 칼을 쓰고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는 중전인 딸과 살아남은 가족들을 위해 불러주는 죄를 모두 뒤집어 쓰고 자살했다. 심온의 재산은 몰수됐고 아내와 딸은 관비가 됐다. 이 와중에 세종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소헌왕후는 태종이 살아 있는 동안은 늘 불안했다. 아버지가 죽기 한달 전에 정식왕비로 책봉됐으나 역적의 딸을 폐서인해야 한다는 중론에 고통을 겪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 관비로 떨어진 어머니와 형제 생각, 처가 문제에 무심한 남편에 대한 원망이 뒤섞여 한시도 편한 날없이 고통 속에 지냈다.
찬경루를 지은 뒤 청송심씨 집안이 잘 풀렸다. 세종 말년에 심온은 복위됐고 소헌왕후가 낳은 첫아들(문종)과 둘째 (세조)는 왕이 됐다. 소헌왕후가 왕비에 책봉되던 해 아버지 심온이 역모에 몰려 죽었다. 그해에 아우 심회가 태어났다. 심회는 세조때 영의정에 올랐다. 심온에 이어 부자간에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오르는 영광을 차지했다. 심온의 아우 심종은 태조의 딸 경선공주와 결혼해 청원군에 봉해졌다. 심연원은 명종때 영의정을 지냈고 심강은 명종비인 인순왕후의 아버지다. 김홍도와 쌍벽을 이루는 조선산수화의 거목 심사정도 청송심씨다.
나무 끝에 화려한 누각이 석양가에 서있어
올라 굽어보니 술잔도 잡기 전에 흥이 먼저 오른다
냇물이 돌아서 천 길 돌 계단을 잠가버리고
산이 둘렀기에 다른 한 조각 하늘을 훔쳐 본다
사록(沙麓)의 상서로운 징조는 참으로 기록할 만하고
도원(桃源) 같은 이곳의 경치는 진실로 사랑할 만하여라
머리를 들어 웃으며 안개 속에 사는 손님에게 향하노니
소부(巢父)나 허유(許由)가 산중에 살았다고 하여
원래 반드시 신선은 아니었으리라.
- 김종직의 시 ‘청송찬경루를 차운하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