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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환 문경지역위원회 위원·문경문협 회장
무술년 새해에 안동에 있는 도산서원을 찾았다. 친구 서넛이 식사도 하고 이곳저곳 둘러볼 작정을 하고 나선 길이었다. 그러나 때마침 찾아온 한파가 안동호 물결과 만나 더 쌀쌀한 바람을 일궈 도산서원 양지 녘을 을씨년스럽게 휘젓고 있었다.

때문에 몸을 잔뜩 움츠리고 서원 앞 샘과 퇴계 선생이 손수 지어 후진을 가르치고 거처하시던 도산서당(陶山書堂), 그 앞에 연꽃을 심었던 작은 연못 정우당(淨友塘), 꽃망울이 총총한 매화원(梅花園), 맨 뒤 전교당(典敎堂), 퇴계 선생의 사당인 상덕사(尙德祠) 앞까지 추운 바람에 쫓겨 다녔다.

그러니 조용히 둘러보겠노라고 마음먹은 것은 허사였다. 아쉬웠다. 추위만 아니라면 서당 마루턱에 앉아 햇볕도 쬐고, 호수 안에 섬으로 솟아 있는 운영대(雲影臺)를 완상(玩賞)하며 퇴계 선생이 걷던 예든길도 걸어 보았을 것인데.

그러나 일행은 석양마저 지면서 이는 찬바람을 여미며 빨리 차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종종걸음을 쳤다. 누구랄 것도 없이 뒤처지면 더 추워질세라 뛰다시피 앞을 다투었다. 그러던 중 서원 입구 들어올 때 못 보았던 ‘매점’을 발견했다. 차와 책, 특산품을 판다는 가건물이었다. 가랑잎에 쓸려가듯 일행은 그리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기계로 뽑는 커피를 한 잔 들고 얼른 서점으로 나섰다. 내 서재에 퇴계전서(退溪全書)가 열권 있는데 이를 건성건성 본 터라, 좀 더 쉽게 퇴계 선생의 얼을 볼 수 있는 책이 없을까 해서였다.

서점은 점원도 없이 밖의 냉기를 그대로 안고 있었다. 처음 눈에 띈 것은 ‘성학십도(聖學十圖)’ 작은 병풍이었다. 좋긴 한데 가격이 8만 원으로 비쌌다. 거기다가 한문 그대로여서 가져가 봐야 장식품에 불과할 것이었다. 어쩌나 하고 있는데, 한 칸 건너 서가에 ‘쉽게 읽는 퇴계의 성학십도’가 눈에 들어왔다. 영남대 최재목 교수가 쓴 150쪽 정도 되는 얇은 것이었다. 가격도 7천 원. 얼른 선택했다. 그리고 눈에 띈 것이 창원대 대학원 박상주 교수가 엮고 해석한 퇴계 선생의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이란 책. 1만2000원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이 책을 펼쳐 볼 마음이 급해졌다. 그러나 친구들 있는 데서 펼쳐보기엔 분위기가 거시기했다. 그래선지 한 시간쯤 돌아오는 길이 무척 멀었다.

내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곧 성학십도를 펼쳤다. 150쪽을 단숨에 읽었다. 제목처럼 ‘쉽게 읽’혔다. 17세 선조를 위해 68세의 노학자 퇴계가 성군(聖君)을 바라며 바친 것이었다. 퇴계의 독창적인 철학에 옛 성인들의 좋은 학문을 집약적으로 편집한 그림과 해설이었다. 지금의 PPT였다. 퇴계는 이것을 바치고 2년 뒤에 돌아가셨다.

여기에서 퇴계는 말했다. ‘도(道)에는 형상이 없고, 하늘은 말이 없다’고. 그래도 항상 소나 양 같은 짐승의 뿔에 떠받히려는 순간, 혹은 내려치려는 몽둥이나 칼 앞에서 움찔하며 급히 몸을 움츠리는 모습, 무서운 어떤 대상이나 존재 앞에서 무지하게 겁을 먹고 쪼는 모습으로 생활하라고.

그것을 퇴계는 경(敬)이라 했다. 경(敬)은 마음의 상태 바로 그것, 내가 내 마음을 주재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마음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원리이고, 마음(심·心)이 스스로를 비춰볼 거울인 것이다.

이 책을 한 번 읽고 인터넷에 원문과 번역문을 찾아 또 한 번 읽었다. 그리고 이들을 스크랩하고 저장해 두었다. 틈틈이 볼 작정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도산서원에 가서 성학십도 작은 병풍을 사다가 책상 앞에 둘 작정이다. 또 기회가 더하면 자식들에게도, 그 자식들에게도 선물할 작정이다. 진작 퇴계 선생을 뵙지 못하고 온갖 풍상을 겪고 난 60 즈음에 뵌 것이 천만다행이기 때문이다.

56회 내 생일은 도산서원이 옛 거울처럼 티끌로 혼탁한 나를 닦아 준 날이었다. 그리고 우리 집 가훈인 ‘일신일신우일신(日新日新又日新)’이 퇴계 선생과 통함이 있었는지, 선생이 성현들의 명(銘), 잠(箴), 찬(贊)을 모아 엮은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 제일장으로 선택돼 있는 것을 발견한 날이기도 했다.

시냇물은 흘러야 제격이고, 샘은 시시각각 솟아야 제격이며, 인간은 새벽마다 거듭 새롭게 태어나야 제격이라는 말을 곱씹는다. 그러면서 어제의 나를 매일매일 닦아내고 경(敬)의 마음과 자세로 살라는 퇴계 선생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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