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1월 2차대전을 치르던 연합군은 절망적 상태에 있었다. 남북으로는 노르웨이에서 그리스까지, 동서로는 모스크바에서 프랑스 서쪽 끝까지 유럽의 거의 전역에 나치 깃발이 휘날렸다. 일본군도 서태평양 곳곳에 일장기를 꽂고 있었다. 연합군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사실상 가망이 없어 보였다.

이와 같은 절망적 시기에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처칠 영국 총리가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만났다. 두 거두는 참모들과 서방 연합군의 전쟁 목표와 전략을 검토했다. 최종 목표는 적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는 것으로 정했다. 이를 위한 전략목표로 대서양해로를 장악하고, 중부유럽의 제공권을 확보하며, 적이 장악한 해변에 상륙해 교두보를 구축하고, 태평양 섬들을 차례로 점령 일본 본토를 공격하는 등 네 가지가 제시됐다.

하나같이 어려운 목표였다. 아무도 방법을 말해주지 않았다. 벤치마킹할 과거 사례도 없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목표를 세운 1년쯤 지난 뒤 이 목표들의 대부분이 달성되거나 현실화 됐던 것이다. 첫째 목표인 대서양 해로 장악은 독일 잠수함과 피어린 전투에 의해 이뤄졌다.

미국과 영국 해군이 기존 장비의 한계를 탓하지 않고 끝없이 개량했으며, 수송선단을 호위하는 폭격기의 항속거리를 지속적으로 늘렸다. 호송선단의 해군은 모두가 나라 탓하지 않고 ‘이순신’이 돼 독일 잠수함 사냥에 나섰다. 결정적 승기는 사상 처음으로 육해공 합동작전으로 이뤄진 상륙작전이었다. 노르망디의 상륙작전과 태평양의 수많은 상륙작전이 승세를 굳혔던 것.

서로 다른 주체를 설득해 조화롭게 움직여 전술적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오케스트라의 명 지휘자에 견줄 수 있다. 군대가 승리를 거두기 위해 보유한 전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격려의 문화’와 ‘혁신의 문화’가 뒷받침된 승리였다. 아무리 많은 병력과 비싼 무기를 보유해도 승리를 향한 확고한 목표와 의지를 가지고 힘을 합치지 않으면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절망적 밑바닥에서 헤매는 자유한국당이 기사회생할 수 있는 길은 수권정당의 면모를 갖추는데 있다. 황교안의 한국당 입당은 불임정당 굴레를 벗을 수 있는 청신호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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