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광복회 등 나라안팎 통합 노력 본보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 기념사진(1920.1.1)
오늘은 3·1운동 100주년 기념일이다.

경북·대구는 한국 독립운동의 발상지이다. 의병항쟁사의 첫 장을 열었고 가장 많은 자정순국자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이다. 위기 때마다 불타올랐던 의열투쟁의 대열에도 어김없이 경북·대구인이 있었다..

경북·대구인이 펼친 독립운동의 특성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통합성이다. 다양한 이념과 방략으로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경북인들은 힘을 모으고자 꾸준한 노력을 기울였다. (대한)광복회와 6·10만세운동은 그 좋은 본보기이다.

또 나라밖에서 전개된 국민대표회의·민족유일당운동·대한민국임시정부·만주지역 3부 통합회의에서 보여준 경북인들의 활약은 통합을 지향했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나랏빚을 갚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곳도 대구다. 여기에는 성별과 계층의 구별이 없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떨쳐 일어나 한 덩어리가 되었다.

전 민족이 하나 되어‘독립국’을 선언한 3·1운동은 대한민국을 탄생시켰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공화제를 이루어 근대국가를 세운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임시정부)와 의회(임시의정원)는 조국광복을 위해 27년 동안 나라 밖 중국에서 쉼 없이 투쟁했다. 이는 세계사에서도 찾기 힘든 일이다.

경북독립운동기념관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 경북인이 약 120명이 넘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여기에 한국광복군에 참여한 수까지 더하면 200여 명이 넘는다. 이는 적은 수치가 아니다.

경북·대구인들은 대한민국의 탄생과 정부수립에 기여했다. 김동삼(안동)·남형우(고령)는 첫 임시의정원 회의(1919.4.10~11)부터 함께했다. 이후 9월 17일까지 열린 제2~6회 의정원 회의에도 김동삼·김응섭(안동), 김창숙(성주), 김정묵(구미), 손진형(경주) 등이 참여했다. 정부에는 남형우가 법무총장에 이어 교통총장이 되었으며, 장건상(칠곡)이 외무차장을 맡아 수립 초기의 틀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또한 임시정부의 국내 연락행정망인 연통제·교통국과 연계해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임시정부 자금지원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활동이 약화된 시기에는 김동삼(안동)이 국민대표회의 의장으로써 회의를 이끌었고, 이상룡(안동)은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 되어 임시정부를 지키고자 노력했다.

1940년 긴 장정 끝에 중경에 도착한 임시정부는 좌우세력을 묶어 통합정부를 꾸렸다. 이 시기 권준(상주)·김상덕(고령)·류림(안동)·이상정(대구) 등이 정부와 의정원에서 활약했다.

1940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일(對日) 항전을 위해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여기에 한지성(성주)이 인면전구공작대 대장으로 활약했다. 한국광복군에 참여한 대구·경북인은 약 80명(전체 광복군의 10%) 정도로 이들은 징병·징용에서 탈출하여 중국의 여러 곳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일제와 맞서 싸웠다.

강윤정 경북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은 “독립운동의 역사 속에는 통합을 위한 노력이 많았다. 생각과 방법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통합을 위한 노력도 멈추지 않았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경험이다”라고 말했다.

오종명 기자
오종명 기자 ojm2171@kyongbuk.com

안동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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