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선 포항 세명기독병원장

국내 심장분야에서는 최고 권위자로 알려진 한동선 원장은 세명기독병원의 빠른 성장 비결에 대해 모든 직원들이 '환자를 가족 처럼' 대하고 있기 때문이라 말했다.

"의사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어릴 때부터 의사였던 아버지를 보고 자란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하지만 아버지는 한번도 저에게 의사가 되라고 말씀 하신 기억이 없습니다."

포항 세명기독병원 한동선(55) 원장은 세명기독병원 설립자이신 고(故) 한영빈 박사(2003년 작고)의 5남매 중 막내로 심장분야에는 국내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부친인 한 박사는 포항 선린병원 설립자인 고(故) 김종원 박사(2007년 작고)와 함께 포항 의료계를 개척한 인물이다. 한 박사는 함경도, 김 박사는 평안도 사람으로, 두 사람 모두 6·25 전쟁때 월남해 포항에 정착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두 사람은 전쟁 직후 폐허가 된 포항에서 내과(한 박사)와 소아과(김 박사)를 각각 개업, 기독 신앙에 기초한 사랑의 인술을 펴는 동시에,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봉사 활동에도 남다른 열정을 쏟았다. 그래서 포항 사람들은 지금도 이 두사람을 '포항의 슈바이처'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한 원장은 "아버지는 당초 1950년 12월 흥남부두에서 목선을 타고 부산으로 피난 가던 중 배에 물이 들어와 침몰 직전에 내린 곳이 포항이어서 이곳에 정착하게 됐다고 말씀하셨다"며 "포항에 내리자 마자 덕수동 중앙교회(현 덕수성당) 마당에 천막을 치고 환자를 돌보기 시작했으니까 세명기독병원이 올해 60주년이 되는 해"라고 회고 했다.

#어린시절의 추억

"선친께서는 북쪽의 부모님과 생이별하고 남쪽으로 피난와 포항에 정착한 후 오로지 병원 일과 교회 일 두가지 일만 하시면서 평생을 사신 분입니다. 밤낮으로 환자를 돌보시다보니 개인적 삶이란 아예 없는거나 마찬가지 였어요. 밤에도 수시로 불려나가 진료한 후 집에 돌아오는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그같은 아버님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고, 지금의 세명기독병원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 원장은 포항 중앙초등학교 5학년때 서울로 전학을 갔다. 하지만 그는 어릴때 친구들과 어울려 수도산, 동빈내항, 송도해수욕장을 돌아다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그때 동빈 내항에는 나룻배가 있었어요. 친구 한명만 다른 친구들의 벗은 옷을 갖고 나룻배를 타고 나머지는 모두 발가벗고 헤엄쳐 송림쪽으로 강을 건넜어요. 솔밭에서 놀다 송도해수욕장으로 가 백사장 모래에 옷을 파묻어놓고 발가벗고 물속에 들어가 조개와 해파리를 잡으며 놀던 기억이 눈에 선합니다. 특히 송림 백양나무 숲 터널이 기억에 남습니다. 바람이 휑하니 불면 백양나무 푸른 잎이 햇빛에 반사돼 반짝 반짝 빛나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당시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 다소 유복하게 어린시절을 보냈다. 때문에 나중에 커서 무엇을 해야겠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나중에 무엇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기 시작한 것은 어느정도 철이들고 나서, 즉 고등학교 때 쯤으로 기억한다. 그때 비로소 아버지의 숭고한 자기 희생정신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로서 어려운 이웃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자 '하나님의 뜻'이란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고 했다.

#의사로서의 일과 보람

그의 하루 일과는 대부분 병원에서 이뤄진다. 진료, 병원 주요 사무 처리, 최신 의학 공부 등 너무 바쁘게 보내다 보니 개인 시간이 별로 없다. 종전에는 틈틈이 그림(유화)도 그렸지만 지금은 엄두도 못낸다. 단지 몇년 전 병원 직원들과 함께 결성한 찬양 밴드 '인더로드' 에서 드럼을 치는게 유일한 취미라면 취미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 저녁시간에 연습한 후 가끔씩 입원 환우들 앞에서 공연도 한다.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과 제가 갖고 있는 의학 지식을 업데이트하는 것이 의사로서 기본적 의무 아니겠습니까. 이 의무를 소홀히하는 것은 일종의 도덕적 해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많은 환자를 보다보면 피곤하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환자의 모습으로 오실텐데 소홀히 해서는 안되지' 라며 스스로에게 채찍질하죠."

환자가 한꺼번에 너무 많이 밀릴 경우 식사할 시간 조차 없는 등 힘들 때가 많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하지만 그는 의사로서 힘든 것보다 병원 경영자로서 힘들 때가 더 많다고 했다. 즉 의료보험제도 등 병원 운영을 둘러싼 여러가지 여건이 힘들게 한다는 것.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한 그는 현재 포항 중앙교회 안수집사다. 그는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신앙의 유산은 제 인생에 최고의 선물이었다"고 말했다.

#빠른 성장의 비결은 '인간 중심'

그는 1996년에 포항 기독병원 병원장으로 취임했다. 그 당시 기독병원은 전체 진료과를 고루 갖춘 일반적인 종합병원이었다. 몇년간 병원을 운영해 본 결과 그는 이런 형태로는 도저히 서울 등 대도시 대형 병원들과 경쟁하기가 어렵다고 판단, 전문병원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한다. 중소 종합병원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병원 이름도 '기독병원'에서 '세명기독병원'으로 바꿨다.

진료과 또한 집중화, 특성화로 승부를 걸기로 하고 정형성형센터와 심장센터, 소화기 센터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이같은 노력으로 이 분야의 진료 수준은 전국 어느 병원과 경쟁해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다. 빠른 성장 비결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특별한 비결보다는 저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를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엔 사람을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좋은 병원이라 함은 좋은 건물과 의료시설을 먼저 떠올립니다. 하지만 저희 병원은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저희 병원이 빠른 시간내에 이렇게 성장하게 된 데에는 류인혁 부원장을 비롯 모든 의료진과 직원이 한마음으로 환자들을 가족같이 생각해 준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60년

세명기독병원의 가장 큰 과제는 의료수준을 지속적으로 높여나가는 것이다. 즉 지방병원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앞으로도 전문분야의 집중화, 특성화를 계속해 나가야 한다는 것. 특히 포항·경주·영덕·울진 등 인근 지역민 뿐만 아니라 대구, 울산, 부산 등 다른 지역민들도 세명기독병원을 찾도록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지역병원에 대한 지역민들의 인식도 이제는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금만 불편해도 대도시의 큰병원을 찾는 분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종합건강진단의 경우만 보더라도 지역 병원에서도 충분함에도 불구, 다른 지역에 가 받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는 지역경제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살아남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지역민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가장 위급한 순간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곳이 바로 지역병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난 60년을 포항시민들과 함께 한 것 처럼 앞으로의 60년도 포항시민들과 함께 할 것이라며 시민들의 변함없는 애정을 부탁했다.

약력

△1956년 포항 태생.

△서울 덕수중·서울고 졸업(1975년).

△서울대 의과대학 의학과(1981년) 및 동 대학원 의학석사(1985년).

△미국 LA Cedars Sinai 메디컬센터 리서치 펠로우 과정(심장내과) 및 의학박사(1989년).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부교수(1993~1995년).

△포항 기독병원 병원장(1996년~현).

△의료법인 한성재단 이사장(2003년~현)

△노동부장관상(2009년) 및 대통령상(2010년 4월) 수상.

△부인 이영실(53)씨와 1남 2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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