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3월 해안을 수색하던 해병대가 오랫동안 수장돼 있던 배 한 척을 발견했다. 이 배에서는 수습되지 않은 유골 조각들이 발견됐다. LST(상륙함정)문산호. 이 배는 1950년 9월 한국전쟁이 한창인 당시 영덕군 장사 해안에서 좌초됐다.

문산호는 1950년 9월13일 오후 부산항에서 출항했다. 이 배에는 교복을 입은 채 길거리에서 모병관에게 붙잡혀 자원입대 형식으로 들어 온 어린 소년들이 목적지도 모른 채 타고 있었다. 이들은 불과 1주일 전 밀양에서 합류해 간단한 제식훈련과 3발 씩의 실탄사격 훈련을 받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유서를 쓰고 유품을 남긴 소년들은 제 키만큼이나 큰 소총을 매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총이라고 해야 인민군에게서 노획한 따발총으로 불리는 PPS-41이었다. 한 배를 탄 772명의 소년들, 이들이 바로 작전명 174, 장사상륙작전을 수행하게 된 학도병들이었다.

학도병과 승조원 42명 등 총 841명이 승선한 문산호는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해안을 향했다. 이들의 목표는 국도7호선을 봉쇄, 북한군의 보급로 차단, 북한군 2개 사단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9월 15일 어둠이 깔린 새벽5시 장사 해안은 태풍 케이지의 영향으로 높은 파도가 일고 있었다. 문산호는 해안에 제대로 접안도 하지 못하고 좌초하고 말았다. 최초 1중대 200여명이 상륙을 시도했지만 높은 파도로 실패하고, 7명의 특공대가 상륙해서 육지와 연결한 로프를 이용해 박계담 소위가 이끄는 5중대가 간신히 상륙에 성공한다. 이어 내륙으로 진출해서 전투 목표인 7번국도 점령, 교량 파괴, 장사리 지서 점령 등의 전과를 올렸다. 이 작전에서 사망 139명, 부상 92명, 다수의 행방불명자가 발생했다.

작전명 174 학도병 장사상륙작전은 9월19일 새벽 6시에 감행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한 그야말로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양동작전(陽動作戰)이었다. 장사상륙작전의 소식을 접한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 극적으로 한국전쟁의 판도를 뒤바꿔 놓는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곧 작전명 174의 성공을 의미한다. 영덕군이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 조성을 마무리하고 있다. 다시 6.25를 맞아 장사상륙작전에서 희생된 청년학도들의 넋을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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