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 장편소설 28

2011년 장편 '7년의 밤'으로 사랑받은 소설가 정유정이 2년여만의 신작 '28'.

이 소설은 '불볕'이라는 뜻의 도시 '화양'에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발생하면서 28일간 벌어지는 생존의 사투를 그린다.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고 군대가 동원돼 도시가 봉쇄되는 등 극한으로 떼밀리는 상황을 5명의 인물과 한 마리 개의 시점에서 서사를 풀어간다.

이 소설은 28일, 살아남기 위한 극한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전작들에 비해 스케일은 훨씬 커졌으며 도시를 종횡하는 끔찍한 전염병과 봉쇄된 도시에서 살아남으려는 주인공들을 묘사하는 작가의 필치는 더욱 세밀하다.

수도권 인근 도시인 화양시. 인구 29만의 이 도시에서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발발한다. 최초의 발병자는 개 번식사업을 하던 중년 남자. 신종플루에 걸렸던 이 남자는 병에 걸린 개에 물린 이후로 눈이 빨갛게 붓고 폐를 비롯한 온몸에서 피를 흘리는 증상을 보인다. 이 남자를 구하기 위해 출동한 119구조대원들을 중심으로 전염병이 퍼지기 시작하고 삽시간에 응급실 의사와 간호사들까지 눈이 빨갛게 변하며 며칠 만에 돌연사 한다. 응급실의 간호사 수진과 소방대원 기준은 점차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하는데….

전염병은 급속도로 퍼져, 수진이 근무하는 병원에 환자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하고 병원 직원들조차 죽어나가기 시작한다. 119구조대원 기준은 자신도 빨간 눈 괴질의 보균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집에 돌아가지도 못한 채 아내와 딸을 화양시 밖으로 내보내려 한다. 그러나 화양시에서 발발한 전염병이 서울을 포함한 다른 곳으로 퍼져나가지 못하게 국가는 사실상 계엄령에 가까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도시를 봉쇄한다. 결국 화양은 점차 이성을 잃은 무간지옥이 되어간다.

접속사를 철저히 배제한 채, 극도의 단문으로 밀어붙인 문장은 살아 숨 쉬는 묘사와 이야기의 힘을 보여주며, 절망과 분노 속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은 진한 감동을 안겨준다.

이번 작품에서 작가는 예상할 수도, 준비할 수도 없었던 재난을 마주한 인간 군상을 다각도로 보여주기 위해 3인칭 다중 시점을 시도했다. 이를 통해 이야기에 지나치게 공백이 생기거나 겹치는 일 없이 5명의 인물과 1마리의 개의 시점을 밀도 높게 오가며, 28일간의 눈보라 몰아치는 도시 '화양'을 구현해냈다.

여기에 알래스카의 끝없이 펼쳐진 설원을 개썰매로 질주하는 머셔(개썰매꾼)의 이야기를 끌어와, '화양'에 더없이 아름다우나 인간에겐 잔인한 설국의 환상을 더한다.

또한 작가 특유의 인간 본성을 화두로 삼는 문제의식으로 세상을 은유적으로 담아놨다. 작가는 재난소설의 익숙한 공식을 답습하는 대신 무의식 속에 밀어두었던 도덕적 질문들을 꺼내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목숨은 타자보다, 동물보다 더 소중한가. 당신은 다른 생명의 희생으로 얻은 삶을 죄책감 없이 살아갈 수 있겠는가.

문학평론가 정여울은 "작가 정유정이 전작들보다 한결 혹독하고 가차 없는 리얼리티로 재난 속 인간 본성의 탐구라는 더욱 본질적인 테마로 육박해 들어가고 있다"고 평하며 "그녀의 붓끝에서 피어난 대재앙의 서사는 가상의 시뮬레이션이라기보다는 지금 바로 여기, 우리의 현실을 향한 뜨거운 알레고리로 읽힌다"고 보았다.

정유정은 2007년 장편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로 세계청소년문학상을, 2009년 '내 심장을 쏴라'로 세계문학상을 받았다. '7년의 밤'은 지금껏 약 30만부가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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