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계에선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판사 분류법이 있다. 근무지에 따라 서울에 근무하는 판사를 '경판(京判)'이라 하고, 지방에 머물러 오래 있는 판사를 '향판(鄕判)'이라 한다. 또 서울에 근무하는 경판 중에도 순회근무지에 따라 흑백으로 갈린다. 순회근무 때 지방으로 내려가는 판사는 '흑판(黑判)'이고, 지방으로 돌지 않고 서울바닥에만 도는 판사를 '백판(白判)'이라 한다. 백판은 특별한 하자가 없는 한 대법관까지 바라 볼 수 있다. 하지만 향판이 대법관에 오르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다. 그런데 지난 1998년 법조계에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났다. 조무제 부산지법원장이 대법관에 올라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이다. 조 지법원장은 30여년간 영남에서만 근무한 전형적 향판이었다. 그가 쟁쟁한 경판들을 제치고 대법관에 오른 것이 화제였다.

조 판사가 창원지법원장에 있던 때 부산이 집이던 그는 지법원장 발령을 받으면서 관용차를 받았는데 "관용차는 창원 안에서만 타고 다니는 것"이라면서 버스로 창원에 가서 법원까지 관용차를 이용했다. 그의 파격 발탁 배경은 '청빈 거사'로 불릴 만큼 도덕적이고, 청렴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골품제 보다 더 하다는 향판과 경판벽을 보기좋게 무너떠린 것이다. 당시 그의 재산은 7천만원으로 103명의 고위 법관 가운데 꼴찌였다.

조 판사처럼 도덕적 판사도 있지만 향판 중에는 법조계의 뿌리깊은 차별의식에 좌절해서 일부 토호세력과 유착해 물의를 빚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때문에 2009년 말에는 토착비리 등을 근절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정기관 종사자의 고향 근무를 배제하는 '향피(鄕避)제'도입이 논의됐고, 이후 부분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최근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의 '황제 노역' 논란과 함께 향판제도의 문제점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허 전회장의 종이 쇼핑백 풀칠하기 노역 일당이 5억원이라 알려지면서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노역 일당을 정하는 것은 판사의 재량이지만 이번 사안은 도저히 일반인의 상식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판결을 내린 판사는 향판이었고, 재판부가 해당 기업 회장에게 특혜를 준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대구에서도 60억 벌금형을 받은 사업가가 일당 2천만원의 황제 노역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단순히 향판의 문제가 아니라 법제도의 결함으로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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