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이념 체계화·교세 재건 사상가 이자 조직가, 혁명 논리 제공·민심 동력 불어넣은 이데올로그,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2대 교주 최시형 재조명

동학초기비사 소설 최시형 망국조중의 지음|영림카디널 출판

소설 '망국'은 동학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을 새롭게 조명한다.

갑오년(1894년) 동학농민혁명에서 최시형의 족적은 의외로 흐릿하게 남아 있다. 창시자인 최제우와 혁명의 선봉장이었던 전봉준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그는 동학 이념을 체계화하고 교세를 재건한 사상가이자 조직가였다.

그는 개벽의 때를 찾아 고뇌하며 '만민의 나라' 조선의 부활을 꿈꾸었던 인물이다. 일촉즉발의 위기에 놓인 동학을 다시 살려 천기를 불어넣었던 최시형이 혁명의 주변인물로 밀려나 있던 까닭은 무엇일까?

조중의

이 책은 동학 초기 비사로 전해오는 1871년 동학교도들의 영해성 거사를 모티프로 삼아 최시형과 그 주변의 혁명가들, 그리고 동학의 근본인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는 민초들을 그려낸다. 부분적으로 픽션을 가미하긴 했지만 등장인물 대부분은 모두 실존했던 인물이다.

1864년 4월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가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참형을 당한 후 도통을 이어받아 교주가 된 해월 최시형의 지위는 위태로웠다. 황망한 기운을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한 채 법통을 물려받은 만큼 최제우의 그늘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교세의 근간은 뿌리째 흔들리고, 수운의 장남인 세정을 따르는 무리와 유림을 버리고 동학당에 들어온 사대부들은 무학자인 그를 좀처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조정의 수배를 피해 산간 오지를 숨어 다니다 겨우 영양 일월산에 거처를 정한 최시형은 스승의 가르침을 전하며 흩어진 도인들을 모으고, 교주로서의 권위를 세우는데 절치부심한다.

몇 년 후 영해접주 박사헌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선동가 이길주는 스승인 최제우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영해성을 도모하자는 제안을 해온다.

최시형은 아직 때가 아니라며 수차례 거절하나 도인들의 성화를 견디지 못해 결국 거사를 허락하고 만다.

전국에서 집결한 도인들은 영해성을 공격해 부사 이정의 목을 베고 관아를 점거하는데 성공하지만 정예 관군이 출동한다는 소문이 돌며 하루만에 철수를 결정한다.

영해성을 발판으로 삼아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히자는 애초의 계획은 물거품으로 끝나고 최시형과 동학당은 도주를 시작한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도피 과정에서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져가는 도인들을 바라보며 최시형은 처절한 반성과 각오를 다진다.

도인들의 희생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최시형은 태백산 깊은 곳에서 동학당의 미래를 다시 설계하고 교주로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결의를 다져나간다.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1894년 갑오년 상달, 일본이 조선 땅을 본격 유린하기 시작하자 최시형은 개벽의 때를 직감하고 10만의 전국 도인들에게 총진격 명령을 내린다.

그는 주변 4강이 나라의 숨통을 조여오고 조정은 무력하기만 했던 당시에 망국은 정해진 수순이라고 생각했다.

이래 망하나 저래 망하나 총궐기로 저항해 민족의 결기를 만천하에 알리고자 했다.

최시형은 이미 구국의 결단을 논할 만큼 커다란 지도자로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소설 '망국'은 절망의 어둠 속에서도 구원의 빛을 밝히려 했던 해월 최시형의 삶에 대한 문학적 복원이다.

유감스럽게도 훗날 역사는 최시형을 아주 사소하게 다루고 있다.

조선이 망하고 일제 치하로 들어가는 과정에서야 그럴만 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남북분단 상황에서는 최시형의 위상이 그저 소리 한번 제대로 내지 못한 나약한 동학교주로 평가절하되고 만다.

동학혁명이 이념의 진영논리가 개입된 민중혁명론과 맞물리면서 혁명의 선봉장이었던 녹두장군 전봉준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때문이다.

이에대해 소설가 조중의는 "엄밀히 따져보면 전봉준은 행동대장이었을 뿐이다. 이에 비해 최시형은 혁명의 논리를 제공하며 민심을 모아 동력을 불어넣은 이데올로그였다"며 "동학의 이념을 체계화한 사상가이자 교세를 재건한 조직가인 최시형이 없었다면 전봉준의 봉기는 불가능했을지 모른다는 추론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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