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전환점이 된 동학농민혁명, 정확하고도 체계적인 보전에 통해 의미·흔적 전국에 제대로 알려야

경상북도는 올해 갑오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아 상주 동학교당의 국가지정기록물을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고, 경주에 수운 최재우 기념관 등 동학 재조명 사업을 벌인다. 동학은 수운 최제우 선생이 1860년 경주에서 창시한 것으로 동학 재조명사업은 만시지탄이지만 충분한 가치가 있고 사업을 조속히 앞당겨야 한다. 상주 동학교당에 보관된 동학대전, 동학경전 발간물, 목판 등 289종 1천425점의 유물은 근대 한국 종교문화, 국문학, 민속학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국가기록원은 지난해 말 국가지정 기록물 제9호로 지정·고시하여 중앙정부차원의 유산으로 관리하고 있다.

다른 복원사업도 매 한 가지이지만 동학정신기념사업도 정확한 고증을 통해 사실대로 해야 된다. 동학의 흔적 지역도 경주, 상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경북 북부지역은 전국 어느 곳보다 항일운동의 성격이 강했다는 것이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몰두해온 신영우 충북대 사학과 교수의 주장이다. 동학 수접주 최맹순이 현 문경시 산북면 소야리(당시 동로면)에 본부를 둔 경상도 북부 동학농민군 가담자는 48개의 접소에 7만여 명에 달한 것으로 관아는 파악했다. 경상북도 농민들이 요원의 불길처럼 동참한 것이다.

경북도내 북서부 경북지역 동학농민혁명은 특히 일제에 맞서 가장 먼저 무력항쟁을 벌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경북도는 동학 농민군의 항일투쟁도 재조명해야 한다. 일본군 정탐병이 현 문경시 산북면 이곡리의 농민군을 살해하면서 1894년 8월 경북지역 동학농민군과 충주의 일본군 공병대 간의 한천전투는 당시 농민군이 전국을 통틀어 일본군과 벌인 첫 전투다. '다시 피는 녹두꽃-동학농민군 후손 증언록'은 이 전투로 농민군 600여 명이 패하고 대일전쟁 준비를 위해 모아 둔 각종 무기와 군량, 군비를 빼앗겼다고 한다. 동학농민혁명 기간 경상도지역 최대 규모의 전투인 예천읍 한천 전투에 참가한 규모는 민보군(民堡軍·反동학 수구조직) 1천500여 명, 농민군 4천~5천명 등 모두 약 6천명이 일대 격전을 벌였다.

한마디로 동학은 세계 보편가치로 충분하다. 개발독재시대 관변주도였던 새마을운동보다 더 경쟁력이 있다. 동학정신은 오늘날 우리사회에서도 그 중심 가치를 고양하고 구현할 필요성이 있는 인문 정신문화이다. 갑오동학농민혁명은 1884년 갑신정변에 이어 척왜(斥倭), 안민(安民)이라는 반외세 반봉건의 근대화 운동이자 민족운동이다. 당시 폐정개혁 12조는 '탐관오리, 횡포한 부호를 엄징한다. 신분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토지는 나누어 경작한다'는 내용이다. 양반층이 주도한 개화운동에서는 담을 수 없는 혁명적인 개혁안이었다. 동학혁명은 고종과 민씨 집권세력이 일본 침략 세력을 끌어들여 실패하고 말았으나 전통 질서의 붕괴를 앞당겼으며 의병운동에 가담함으로써 항일구국무장투쟁을 활성화시켰다. 이 자유와 평등 이념은 10·1대구항쟁, 3·15마산의거 4·19혁명,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이처럼 이 나라 근대사의 전환점이 된 동학농민혁명이 오랫동안 그늘에 가려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등은 선열들이 자신의 삶은 물론이고 혈육들의 안락한 삶을 희생한 결과가 아니던가. 역동의 근대사의 시작인 갑오동학농민혁명에서 엄청난 규모로 치열하게 참여하며 희생한 지역 동학농민운동을 돌아봐야 할 의무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늦은 감이 있으나 경상북도와 각 지방자치단체는 정확하고도 체계적인 보전에 나서야 하며 그 의미와 흔적을 제대로 전국에 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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