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융성시대 지역문화 현주소- 작품의 유통·창작·교육 활성화 해야

허정선 포항시 문화예술과·미학박사

2. 공연장 문화시설의 역할

수 년 전 포항문화예술회관을 '예술의전당(Arts Center)'으로 개칭하는 것에 대한 설문조사가 있었다. 설문의 결과는 개칭에 반대하는 입장이 많았고, 지금도 여전히 '문화예술회관'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포항의 대표적인 공연장이라고 할 수 있는 포항문화예술회관은 과연 어떤 명칭이 더 적합할까?

통상 공연장 문화시설은 문화예술회관, 예술의전당 이외에도 문화회관, 아트홀, 아트센터 등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포항문화예술회관 야경.

공교롭게도 명칭 개칭에 대한 설문조사가 실시될 무렵 포항의 문화인 100명이 참여한 포항문화정책 관련 모임에서 포항문화예술회관은 예술행사 이외에 운전자교육, 민방위교육 등 행사가 왜 이뤄지고 있는지, 시관계자로서 답변을 요청받은 적이 있었다. 순간 머릿속에는 명칭에 대한 개념 규정부터 복합적인 2차적 문제까지 많은 것들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이 많은 것을 언급하기엔 시간상 역부족이었다. 대관업무 담당자에게 물어보겠다고 일축했다.

이 질문에 대한 올바른 답변은 '문화(文化)와 예술(藝術)'의 개념을 바로 알 때 가능하다. 이 둘은 역사적으로도 긴밀한 인연을 맺어왔고, 더러는 개념의 혼동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문화와 예술'의 개념부터 살펴보자.

문화는 예술뿐만 아니라 삶의 다양한 양상을 포괄하는 보다 폭넓은 개념이다. 예술은 복식문화, 음식문화, 주거문화 등과 같이 문화의 한 범주를 이루는 것으로서 인간의 광범위한 문화활동들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말 합성어의 구성상, '예술문화'라는 말은 성립되지만 '문화예술'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굳이 '문화예술'이라고 표현하고 싶을 때는 '문화와 예술'이라고 사용하거나 '문화·예술'이라고 사용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문화예술'이란 단어를 빈번히 사용한다. 언어의 사회성을 무시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문화'와 '예술'의 개념을 바로 알고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술의 문화'라는 의미에서 '예술문화'이고, '문화예술'은 '문화와 예술'이다.

다행이 문화예술회관의 영어식 표기는 'Culture & Arts Center(문화와 예술 회관)'이다. 즉 문화예술회관은 예술회관인 동시에 문화회관인 셈이다. 그러므로 문화예술회관은 예술과 관련된 행사만 하는 곳이 아니라 교통, 학술, 일반교육 등 삶의 모든 양상과 관련된 문화행사를 할 수 있는 곳이라는 '슬픈' 결론이 나온다. 실제로 포항에는 컨벤션 센터와 같이 문화행사를 수용할 수 있는 큰 홀이 없기 때문에, 포항문화예술회관에서 예술행사만이 아니라 각종 문화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예술행사가 주로 이루어지는 공간시설이라면 예술의전당이나 아트홀, 아트센터가 더 적합한 시설명칭이겠지만, 다른 문화행사들이 예술행사에 비해 비등하게 이루어진다면 명칭 개칭은 적절치 않다. 또한 무엇보다도 예술의전당이나 아트센터는 공연과 전시 개최를 위한 기반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야 한다. 운영인프라(인력, 예산 등)와 관리시스템의 적절성이 먼저 검토돼야겠지만, 1995년에 건립돼 20년의 세월을 보낸 포항문화예술회관의 경우 무대안전시설 및 조명·음향 시스템, 대기실, 로비 매표 및 안내 시스템, 그리고 낙후된 전시실 환경 등이 전반적으로 시급하게 보완돼야한다. 공연장 문화시설의 명칭 문제는 '문화와 예술'의 일반적인 개념만으로 해결될 수 있지만, 공연장의 기능 문제는 두 개념에 대한 인문학적 의미를 따져 보아야 한다. 먼저 예술(藝術) 개념부터 살펴보면, 한자 문화권에서 예(藝)는 식물을 심고 기른다는 뜻이며, 술(術)은 심고 기르는 솜씨를 의미한다. 서양에서 영어의 아트(art, 예술)의 어원 가운데 라틴어 아르스(ars)를 살펴보면 역시 기술이나 솜씨를 뜻한다. 고대 호라티우스가 시를 포우에시스(poesis)로 언급하였는데, 사실 포우에시스는 시(詩)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기술(당시에는 인간의 보다 폭넓은 기술을 지칭하는 말로 포우에시스보다 테크네techne를 더 많이 사용함) 즉 예술일반(arts)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만큼 예술은 제작의 의미를 갖는 좋은 기술이나 솜씨를 가리키는 말과 혼용되었던 것이다. 서양에서 18세기 이전까지는 삶과 예술이 엄격히 분리되지 않았으므로 이는 당연한 것이다.

문화의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논밭을 경작한다'는 뜻의 라틴어 콜레레(Colere)라는 단어가 한자어, '예'의 뜻과 아주 흡사하다. '콜레레'라는 동사의 과거분사형 쿨투스(Cultus)에서 경작, 숭배라는 뜻의 컬트(Cult)가 나왔고, 여기서 교화(敎化)나 문화를 뜻하는 쿨투라(Cultura)가 나왔다. 쿨투라는 영어의 컬쳐(culture) 즉 문화이다. 이렇게 보면 예술이나 문화의 본래적 의미는 식물을 기르고 논밭을 경작하듯이 사람의 품성을 기르고 수련한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영어 mental culture는 '정신문화'로 번역되지 않고 '정신 수련'으로 주로 번역된다.

그러므로 문화시설의 주된 기능은 문화·예술 행사 자체보다는 문화·예술 교육을 통한 품성 연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공연장 문화시설은 교육의 기능 이외에 작품의 유통 기능, 창작 기능이 있다. 작품의 유통은 주로 공연장이나 전시실 대관 행사와 초청^기획공연 추진을 통해 이루어지며, 작품의 창작은 시립예술단이나 지역예술단체 창작공연과 기획전시 추진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문화^예술 교육의 기능은 문화아카데미 등 특별프로그램과 인문강좌와 예술강좌 등을 통해 이루어진다. 일부에서 백화점식 문화강좌개설로 '품성 함양'이라는 문화·예술 교육의 본질적 목적을 도외시하고 마케팅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서울·경기 지역을 제외하고 작품의 유통·창작·교육, 이 세 가지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공연장 문화시설은 그다지 많지 않다. 경북 지역 공연장 문화시설의 경우 작품의 유통은 그런대로 활성화되고 있지만, 작품의 창작은 상대적으로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문화·예술 교육 프로그램은 부재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포항문화예술회관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꿈의오케스트라' 프로그램과 '꿈다락토요문화학교'프로그램 등을 진행하고 있어, 교육 기능의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오늘날 다중매체시대는 문화상품들과 작품들이 대중 앞에 수없이 쏟아지기 때문에 그 가치를 변별할 수 있는 미적 안목을 길러야 한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중의 미적 안목의 깊이도 문화·예술 교육의 몫이다.

위의 세 가지 공연장의 기능을 충족하는 문화시설이 되려면 무엇보다 휴먼 인프라(전문 인력 충원)와 소프트웨어 인프라(운영 시스템, 프로그램, 예산 확보 등)가 선행되어야 하지만 하드웨어 인프라(문화시설)가 기본적으로 갖추어지지 않으면 그 지역의 문화·예술의 발전은 항상 걸음마 수준에 머물게 된다.

'문화융성'의 시대를 지향하는 시대적 상황에 부응하여 1천500석 이상의 대형홀을 갖춘 공연장을 바닷가에 신설하고 기존 건물을 컨벤션 센터 및 중극장, 소극장, 다목적 전시실을 갖춘 복합문화시설로 개보수하여 사용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비용 대비 파급효과를 꼼꼼히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공연장 문화시설은 눈에 보이는 제품을 만들어 재화를 모으는 공장은 아니지만, 제대로 운영되면 포항의 보고인 해양관광산업 등 2차 서비스 산업이 활성화될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것이다. 포항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인정받는 '문화융성'시대가 곧 올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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