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후손 권대용씨…15대 종조부 노량해전·조부 독립군으로 순국

권대용씨가 종조부인 권전의 묘소가 있는 안동시 풍산읍 계평리 '불당골' 선산에서 임진왜란 당시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순국한 기록을 가리키고 있다.

"일본이 또 다시 한반도를 놓고 침략야욕을 드러낸다면 두 번이 아니라 열 번이라도 나서 싸워야지요."

경술국치 104주년이 되는 29일, 권대용(66)씨는 자신의 할아버지인 항일순국지사 추산 권기일(1886~1920) 선생의 초상을 안고 최근 우경화의 길을 걷고 있는 일본을 향해 다시 한번 강한 투지를 불태웠다.

"한분은 동짓달 차가운 경남 노량 바다 물속에서, 한분은 살을 애는 듯한 동토의 만주 통화현에서 호국영령이 되셨지만 집안에서는 두 분 다 시신을 거두지 못해 한이 맺혀 있습니다."

권씨의 대곡문중은 한반도를 넘 본 일본을 상대로 두 번씩이나 종손이 목숨을 던져 싸운 호국충절의 명문가이다.

최근 개봉된 영화 '명량'이 관람객 1천600만 명을 돌파하면서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인기가 범국민적으로 높아지자 장군의 휘하에서 해전마다 선봉장에 나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안동출신 장수가 있었다는 사실이 처음 알려지면서 화제다.

화제의 주인공은 바로 항일독립지사 추산 권기일(1886~1920) 선생의 손자인 안동권씨 부정공파 대곡문중(안동 남후면 검암리)의 종손 권대용씨의 15대 종조부(큰할아버지) 권전(1549~1598)이다.

안동시 풍산읍 계평리 권전의 묘소비문에 따르면 조선 중종때 이조판서를 지낸 마애 권예(1495~1549)의 맏손자인 권전은 문중의 종손이지만 선조 15년(1582)에 무과(武科)에 급제한 뒤 경남 고성군의 고을 수령인 현령을 지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 장군의 휘하로 들어가 만호라는 벼슬을 받고 판옥선 함장에 임명된다.

해전 때마다 조선수군의 선봉장으로 용맹을 떨친 그는 옥포, 사천, 당포, 명량해전에서 연전연승, 혁혁한 전과를 올리다가 나중에 아장(亞將·준장군)이 되어 장군선(船)에 올라 이순신 장군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게 된다.

12척의 판옥선으로 왜군 전함 500여척을 격파, 세계 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대승을 이룬 운명의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을 보좌하며 끝까지 결사항전하다 장군과 함께 장렬히 전사한다. 선조 31년 11월 19일로 그의 나이 오십이었다.

그의 둘째 아우 권극도 형처럼 무관의 길을 걸으며 나라에 충성했다. 셋째 아우 권지에게는 선조가 권전의 공로를 인정해 벼슬을 하사했다. 하지만 권지는 이를 마다하고 안동에서 영양(당시 진보현)으로 피신해 평생 학문과 후학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세월이 흘러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가 일어나고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면서 또 다시 권씨 집 문중 종손은 항일투쟁에 뛰어 든다. 당시 대곡문중의 종손인 추산 권기일은 천석에 이르는 전답과 종가집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소요되는 군자금을 마련, 이듬해인 1911년 3월 식솔들을 이끌고 만주로 건너갔다.

임시정부 초대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을 도와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 설립자금을 대고 본격적인 항일 무장투쟁에 나섰다. 이곳에서 훈련된 약 3천여명의 독립군은 나중에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등 청사에 길이 빛나는 항일 독립투쟁의 전과를 세우게 된다.

독립군과의 전투에 대패한 일본군들이 독립군의 본거지인 신흥무관학교를 보복 습격할 당시인 1920년 8월 15일 소총 한자루와 권총 두자루로 홀로 신흥무관학교를 지키며 최후의 1인으로 항전하다 결국 일본군에 포위되면서 나이 서른여섯에 순국한다. 임진왜란 당시 노량해전의 포연이 멎은 뒤 322년 만의 일이다.

피맺힌 조상들의 투쟁사를 들려 준 권대용씨는 "나라가 위급한 상황을 대비해 또 다시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면서 "이 준비가 자신이 죽기 전 꼭 해 놓아야 할 필생의 사업"이라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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