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이 강조되는 요즘 이국적 정취 풍기는 통영에서 사람냄새 나는 봄을 맞이하자

▲ 이상식 시인
여행의 묘미는 경이로움에 빠지는 것이다. 팍팍한 일상을 벗어나 어디론가 가노라면, 낯섦의 경탄에 젖는다. 그것은 소소한 떨림일 수도 있고 강렬한 충격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신선한 감동을 받는다는 것, 지친 삶의 힐링이기도 하다. 그 놀람이 쌓여서 기억이 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추억으로 화한다. 멋진 과거를 한가득히 간직한다는 것은 인생이 풍요롭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구두코 적시는 봄비가 심심찮은 사월. 1박 2일의 통영 나들이. 작가들의 흔적을 더듬으며 식도락을 즐길 여정이다. 통영은 아름다운 항구 도시이다. 육지가 바다를 포용하여 자리를 내어준 아늑한 호수 같은 포구. 둥그런 해변엔 하얀 모래톱 대신 상가와 시장이 어우러져 사람 냄새가 진득하다.

정지용 시인은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풍광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고 말했다. 혹자는 세계 3대 미항의 하나인 나폴리와 비유하기도 한다. 나란히 손잡은 고깃배 대신에 날렵한 요트가 줄지었다면 손색없는 표현이리라.

통영은 예술가의 산실이다.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 기념관, '꽃'의 시인 김춘수 유품전시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의 시인 유치환의 청마문학관 그리고 윤이상 기념관과 전혁림 미술관을 찾는 발걸음이 끊임없다.

골목길에 다닥다닥 붙은 가난한 어부의 쉼터였던 언덕 위의 동피랑마을. 화가의 붓으로 탈바꿈한 운치 있는 산책로. 채색된 벽화는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하다.

남자의 일박은 술박과 동의어다. 하긴 출발부터 그랬다. 일행 중 누군가 묻는다. 통영은 무슨 술이냐고. 브랜드가 뭐냐고. 상갓집엔 없다는 '무학소주 좋은데이'. 술독의 대박을 예감이나 하듯 우리는 박장대소했다. 간만에 엄청 마셨다. 숙취로 애먹긴 했으나 우정이 깊어간 통영의 봄밤. 어쨌든 남자의 주정은 애교(?)다.

여행은 선물을 사와 즐기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내와 함께하는 여행의 뒤풀이랄까. 희미한 불빛 아래 오순도순 별식을 나누는 정경은 상상만으로도 오롯하다. 통영만의 먹거리에 욕심을 냈다. 고주망태로 '우짜' 맛집을 찾았으니 오죽하랴. 자장면에 우동 국물을 섞은 우짜. 취중의 식감이 어렴풋하다.

현지에서 먹은 도다리쑥국은 새봄의 향긋한 메신저. 그리고 빼떼기죽과 오미사꿀빵, 충무김밥과 생굴을 사왔다. 소중한 이와 더불어 색다른 음식을 탐미하는 행복은 형언할 수 없다. 여행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다. 여운은 추억으로 남았고 선물은 사랑으로 남았다.

삼도수군통제영은 요즘으로 치면 해군사령부쯤 되겠다. 거대한 현판과 아름드리 기둥의 카리스마가 압도적인 세병관.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는 의미라니 살벌한 군문이 문학적이다. 멋진 작명 아닌가. 시인이 따로 있으랴.

작금 슬로우 열풍의 시대이다. 느림의 미학이 강조된다. 빨리빨리 문화는 바뀌어야 한다. 음식을 먹든, 구경을 하든 뭔가에 쫓기듯 바쁘다. 진리를 궁구하듯 여유가 아쉽다. 유유자적 느긋하게 살아가자. 일행을 보면서 품은 일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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