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삶 거창하지 않아도 소소한 일상 속 행복 가득해 연민 대신 격려의 악수 감동

▲ 이상식 시인
십여 년 전이던가. LG경제연구원이 '정년퇴직을 퇴직시키자'는 도발적인 보고서를 냈다. 고령화의 문제는 고령 세대가 일을 하지 않아 생긴다는 요지이다. 그럼 평생 일만 하다가 죽으란 말이냐고 반문한 기억이 난다. 인생을 경제 논리로 재단한 나머지 정작 본질을 소홀히 한 건 아닐까.

대한민국 은퇴자의 처지는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노후 준비가 안 된 분들은 어려움이 절절하리라. 그래서 퇴직에 관한 화두가 조심스럽다. 개인적으로는 오월 초하룻날 퇴임 백일을 맞는다. 일찍부터 물심양면으로 고민을 해온 터라 수월한 편이다.

나는 백수다. 대학의 프레쉬맨 같은 새내기 백수다. 난생처음 경험하는 무직업자. 인생길에 맞닥뜨린 일대 사건이자 필연이다. 백수 아닌 시절, 하얀 피부는 나의 로망이었다. 꿈을 안고 좌충우돌한 젊음은 유수처럼 흘러갔다. 올 초 하얀손 클럽에 얼쩡댐으로서 야인이 되었고, 백수의 여유를 순조롭게 연착륙 중이다.

직장을 그만둘 때 타인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어쩌나" 연민 가득한 눈빛으로 동정하는 부류가 있고, "축하해요"격려의 힘찬 악수를 건네는 갈래가 그것이다. 솔직히 후자의 덕담이 정겹다. 희망이 넘치는 어투란 느낌이 들어서다. 교육장으로 퇴임한 지인은 점심을 사면서 "이젠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축포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은퇴의 의미를 아는구나 감동했다.

인간은 관계의 동물이다. 혈연·지연·학연의 그물로 엮인 인간 사회. 그물코가 잘못 되면 고기가 도망치듯 관계가 미숙하면 갈등에 휩싸인다. 회귀한 연어처럼 가정으로 돌아온 은퇴자. 동병상련이랄까. 흔히들 시간을 함께 보낼 친구와의 관계를 우선시한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배우자와의 관계 설정이 아닐까. 패러다임의 변화가 요구되는 변곡점으로, 핵심은 삼시 세끼와 각자의 사생활이다.

여성들이 나누는 대화가 있다. "그 집 남편은 일식이야, 삼식이야." 집에서 밥을 먹는 횟수를 가리키는 유행어. 삼식하는 남편을 둔 주부는 애로가 많겠다는 함의이다. 왜 식사는 하루 세 번이어야 하는가. 예전부터 품은 의문이다. 틀을 박차고 싶었다. 자유인이 되면서 시도해 봤다. 심신의 에너지 소비가 적은 탓인지 별문제가 없는 듯하다. 단언컨대 혼밥이 자유로워야 진정한 백수이다.

금실지락의 취미 활동이 다른 경우가 많다. 우리 부부도 그러하다. 아내는 운동과 댄스에 만족하고, 나는 독서와 여행에 공들인다. 서로의 취향을 가급적 존중한다. 북쪽의 방을 서재로 삼았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빛살이 싫어서다. 차분한 분위기로 혼자만의 적막을 갖는다. 가끔은 한동대 도서관도 드나든다. 어학 공부와 악기 배우기. 논어의 첫 구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그대로이다. 작금 내 인생의 골든타임이라 여긴다. 유효기간이 다하는 순간까지 다만 이 기분에 취하리라.

삶은 소소한 것들로 이루어진다. 거창한 꿈이 필요치 않다. 작은 행복을 추구하노라면 희열이 차오른다. 은퇴자의 열락도 멀리 있지 않다. 일상 속에 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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