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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인문학

우주의 시공속에 사는 삶 한 생각 생각이 청정하면 머무는 곳 마다 극락정토

최재목 시인·영남대 철학과 교수 등록일 2015년11월12일 22시11분  
▲ 최재목 시인·영남대 철학과 교수
가을의 서녘 하늘은 왠지 차가운 듯 따스하다. 아미타불(阿彌陀佛) 생각이 나서다. 무한한 목숨(無量壽)과 무한한 빛(無量光)인 그분은 오랫동안 수행하여 10겁(劫) 전에 이미 부처가 되어 서녘 저 '극락(안락)'이라 불리는 정토에서 설법을 하고 계신단다. 이분을 만나려면 지금 여기서 서쪽으로 십만 억(현대의 숫자 계산으로 친다면 십만 조) 개의 정토를 밟고 지나서야 닿을 수 있단다. 내 발로 걸어서 가기에는 너무 아득하다. 포기하는 것이 맞다. 아, 이런 식이라면 도대체 우리는 언제 가고 싶은 곳에 가 닿을 수 있으랴.

그러나 아니다. 단 한 번이라도 그분의 이름을 외치기만 하면 마음속에서 바로 만날 수 있다. 간절한 믿음과 소망은 무한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찰나 우주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우주의 시공간 속에 있다. 무한을 마음속에서 경험한다. 눈 감고 누워서 유럽에도, 달에도 별에도 다녀오듯이 아미타불 거처의 방문턱이 닳아 빠지도록 왕래할 수 있다.

미륵보살은 56억7천만년 뒤에 오실 준비를 하고 계시는 미래불이다. 이 분이 오시기를 기다리려면 자그마치 56억7천만년을 기다려야 한다. 그동안 고독 속에서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견뎌야 한다. 우리의 수명을 생각한다면 현생에서는 기다릴 생각을 말아야 한다. 아니 차라리 죽어서 그분을 만나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러나 아니다. 간절한 소망과 믿음이 있다면 살아서 언제든지 그분을 접견할 수 있다.

유식불교에서는 보살이 마음(識)을 닦아 지혜(智)로 전환하여 성불하는 데 자그마치 세 단계의 아승기겁 '삼아승기겁(三阿僧紙劫)'이 걸린단다. 아승기는 무량의 숫자이다. 겁이라는 것도 그렇다. 즉 단단한 바위산을 누군가 부드러운 천으로 100년마다 한번 씩 와서 스윽 스쳐서 닳아 없어지는데 걸린다는 시간이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수행의 기간 아닌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누구나 미망에서 벗어나 깨달음에 이르면 단박에 이 몸으로 그 영원을 건널 수 있다. 무한이라는 시공간 관념도 우리들의 덧없는 분별이고 환영이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고 하였다. 진리(도)에 접하는 순간 이미 영원에 들어서게 되니 세속적인 의미의 죽음이 이 몸에 손댈 수 없다. 진리에 든다는 것은 영생이라는 무한의 시간에 눈 떠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인간이 생로병사에서 경험하는, 해가 뜨고 지는 식의 지속적인 시간을 '크로노스'라 하고, 선택과 결단, 자각으로 만들어지는 주관적, 의식적인 시간을 '카이로스'라고 한다. 전자는 인간이 관리 불가능한 시간이고 후자는 우리들이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시간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량의 시간은 카이로스 차원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고달픈 길 나그네 길"처럼 살아 있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순간순간 아승기겁을 경험한다. '염념보리심, 처처안락국(念念菩提心, 處處安樂國)'이라 했다. 한 생각 생각이 청정하면 머무는 곳마다 극락정토라는 말이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고통스런 일이다. 아픔과 상처를 달고 살아가면서, 가끔 고개를 들어 맑고 푸른 하늘을 쳐다보는 연습이다. 우리는 비극의 한복판에서 희극을 생각한다. 그래 희망은 있는가.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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