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나시에서의 열흘은 꿈 속 세상과도 같았습니다. 인도의 어머니 강 갠지스를 바라보며 멍 때리는 순간, 눈앞에서 이승의 씨줄과 저승의 날줄로 한 폭 풍경화를 직조하고 있었습니다.

사람과 짐승이 똑같은 계급장을 단 채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법 없이 *강가의 빠르기로 스쳐 갔습니다. 저만치 연기가 피어오르는 화장장 길목에는 태어나 한 번도 머리를 감지 않은 듯한 사두들이 *꼴깨로 마리화나를 피우며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과 나 자신의 역할을 맞바꾸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법한 환각에 빠져 들기도 했습니다. 사물을 지칭하는 단어들을 서로 뒤바꿔놔도 원래 그러려니 할 정도로 삶의 무대는 죽음에 바짝 다가가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은 제 역할을 다한 배우를 대나무 상여에 실어 한시바삐 시바신 곁으로 보내드리기 위해 화장장으로 향합니다. 그런 광경에서 감히 누구의 핍진한 삶을 누구에게 투사한다는 식의 말을 꺼낼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말로는 부족했기에 숱한 젊은이들이 인도로 오면 정수리가 타는 듯한 열기 속에서 멍 때리고 앉았던 건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둠이 몰려들어도 연극은 그치지 않습니다. 달빛 어린 강어귀에서 시신의 목걸이였던 재스민 꽃은 염소며 소의 먹이가 되고 갓 꺼진 장작불 속의 잘 익은 시신은 개의 저녁 식사가 되는 광경은 바로 우리가 바비큐 요리를 먹는 것과 별다르지 않았습니다. 바라나시의 화장 문화가 사라지면 인육에 맛들인 개가 사람에게 달려들지 않을까 걱정스러웠습니다. 때 아닌 추위에 도미토리로 돌아오면 잠은 저만치 멀어져 갔습니다. 그런 일마저 잊으라는 듯 저 멀리서 누군가가 만트라를 외며 싯타르를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경북일보 문학대전에서 경험이 바탕이 된 작품을 공모한다는 안내문에 귀가 솔깃했습니다. 이보다 나은 리얼리티가 있을까 해서 였던 겁니다. 예상이 적중했다기보다 저에 앞서 어느 누구도 바라나시의 얘기를 소설로 만들지 않았던 게 행운을 안겨다 준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귀한 자리에 서게 해 주신 심사위원님과 경북일보며 담당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강가 : 어머니의 강 갠지스를 일컫는 인도어

*꼴깨 : 마리화나를 필 때 쓰는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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