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손 대대로 이어지는 강직한 충·효·우애·베풂의 삶

▲ 보물 제457호 예천권씨 초간종택 별당은 초간종택의 사랑채다. 15세기 말에 초간 권문해의 할아버지인 권오상이 지은 것으로 조선 전기 누각형 접객 건물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드문 사례이다.

전통문화의 정수, 유교문화와 선비정신이 오롯이 서려있는 곳이 종가다. 예천군에는 13개의 종가가 있으며 불천위를 모시는 곳이 3곳(별동 윤상, 초간종택, 약포정탁)이다.

예천군 용문면에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실용학문과 사학자의 길을 택하고 시를 좋아한 조선시대 지식인 초간 권문해(草澗 權文海·1534~1591) 종가가 있다. 초간 13대 권영기(78) 종손과 이재명(77) 종부를 만나 보았다.



"우리 종가의 가훈은 강직과 효, 우애, 베풂입니다. 먼저 강직은 충을 뜻하고, 효는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기본이 돼 의로운 일에 앞장서고 행하는 것이 대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 선행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이라 했듯 저희 집안은 변란이 있어도 선대의 업적으로 그 누구도 근접하지 않는 종가 입니다"

권문해 선생은 23세 때 퇴계 이황의 제자로 들어가 성리학을 배우며 특히 역학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기록을 남겼다.

종손 권영기 씨는 "선비 되는 자가 입으로 중국의 역사를 어제 일처럼 얘기하면서 자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에 통탄하면서 우리의 역사를 남겨야 겠다"며 "성리학보다 역사학을 더 연구했다"고 전했다.

이로 인해 조선시대 백과사전으로 불리는 대동운부군옥책판(부)고본(보물 제878호)이 탄생됐다.

▲ 초간종택의 13대 종손 권영기(78)씨는 "6·25 당시 에도 인민군이 동네 소를 다 잡아먹고도 집앞까지 와서도 함부로 초간 종택에는 들어오지 못했다"며"그날 밤 제사를 지내는데 인민군 장교가 찾아와서는 공습이 있을 예정인데 담요로 불빛을 가리고 지내라고 정중히 예를 갖추고 돌아갔다"고 말했다.


초간 선생의 충의와 강직한 성품을 볼 수 있는 일화들이 많다. 초간선조년보에서는 "아무리 당로자(當路者·권세가 막강한 권력자) 앞이라 할지라도 옳지 못한 일에는 절대 굽히지 않고, 조정에 나아 간신 후 선생의 탄핵을 받은 자가 무려 50여인이나 됐다"고 기록돼 있다.

권두경은 '계문 제자록(퇴계 이황 제자 기록)에서 초정선생을 "호원이 동료들과 병조판서 이이가 나랏일을 전단하는 것을 논핵하였는데 후에 이이가 낯빛을 달리하자 공은 사사로운 뜻이 아니었다 고 웃음으로 대답을 했던 일과 신묘년(1591)에는 송강 정철의 죄를 논핵하여 정철이 마침내 죄를 얻었다"고 기록했다.

이 당시 초간 권문해 선생은 사간원장(상소문을 담당하는 책임자)이였다. 그 어떤 누구라도 상소가 올라오면 죄를 묻는 것이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초간 선생은 율곡 이이와 송강 정철 같은 당대 최고의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맞서 죄를 묻고 불의에 참지 못하고 나서는 강직한 관료였다.

초간은 흔치 않은 예천을 본향으로 한다. 본래 예천 권씨는 흔(昕)씨였으나 고려 충목왕의 이름이 흔이어서 왕명에 따라 권씨로 고치게 된 것이다.

예천권씨 문중의 대표 인물로는 권맹손(權孟孫·1390~1456), 권오기(權五紀·1463-미상), 권오복(權五福·1735-1749), 권문해(權文海·1534~1591)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예천군 용문면 면소재지에서 멀지않은 죽림마을에는 초간이 태어났던 종택을 비롯, 국가지정 문화재 5개소와 경상북도 지정 문화재 3개소 등 수많은 문화재들이 밀집해 있다.

▲ 대동운부군옥 초고.


초간이 활동했던 시기는 학문과 문학에 걸출한 재능을 가진 인물들이 많이 배출돼 '목릉성세(穆陵盛世)'라 불렸으며, 이 시기 활동했던 두드러진 인물로는 경북 북부 지역의 약포 정탁,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등 퇴계의 제자들이 주를 이뤘다. 당시 성리학을 중시하던 시대 실학문을 연구해 책으로 목판으로 남긴 이가 초간 선생이다.

예천권씨는 예천에 터를 잡고 누대에 걸쳐 세거해 왔다. 5세 '권선(權善)'대에 이르러 선대(先代)에 드물게 오행, 오기, 오복, 오륜, 오상 등5형제를 두었다.

이들 형제가 전부 과거에 급제, 조정에서는 '오복문(五福門)'이라 칭하며 모두들 부러워했다. 그러나 이들이 벼슬길에 나서며 모처럼 가문의 번성을 꾀하였으나, 조선 10대 왕인 연산군 시절의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인해 예천권씨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후 많은 자손들이 안동권씨로 흡수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무오사화'로 인해 중앙관직에서는 잠시 멀어졌으나 선비의 기개는 후손들에게 이어져8세 권문해(權文海)는 일찍이 퇴계 이황(李滉)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다시 '권문(權門)'의 명성을 널리 떨쳤다.

이러한 예천 권씨는 예로부터 자손이 귀해 지금도 그 수가 많지 않다. 특히 무오사화를 겪으며 후인들이 안동권씨로 살아가게 된 경우가 많이 있었다. 후에 그 문제에 관해 심각한 논의가 있었으나 이미 여러 세대를 안동 권씨로 살아오던 후손들에게 족보를 수정하라고 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랐다.

권영자 (전)정무 2장관, 초정 권창륜 서예대가, 권중호 경북대학교 교수, 권승하 (전)국정원 차장, 권이섭 국방홍보원장, 권경열 박사(한국고전번역원 연구관), 권병하 (전)세계한인무역협회장 등이 예천권씨다. 또 권영일 예천군의회 의원, 권중섭 (전)예천대창중학교감, 권규호 권병원장, 권재진(인제약국)약사 등이 예천사회에서 귀감이 되는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또 11대 종손 권석인 외 3명이 독립 유공자들이다. 11대 종손은 기미 독립 선언문을 서울에서 들고와 예천 용문 금당실과 호명면 용궁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했다.


▲ 대동운부군옥 책판.



■ 초간종택

예천읍에서 승용차로 15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용문면의 초간종택은 선인농학형(仙人弄鶴形 신선과 학이 어울려 노는 곳)의 명당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종택자리는 만석지기 부자(富者)가 나는 용문 두인 자리와 학자가 나는 현자리를 놓고 비교하다가 비록 백석지기 부자는 나지 않을 지언정 학문하는 자는 백대토록 계속된다는 '부불백석문한계승지지(富不百石文翰繼承之地)'로 터를 정했다.

초간 종택은 예천권씨 초간 권문해의 조부 권오상이 선조 22년(1589)에 지은 건물로 안채의 오른쪽 앞에 사랑채가 있고, 오른쪽 뒤편에는 사당이 있다.

사당에는 초간 선생의 불천위(공훈이 있는 사람으로서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를 모시고 있는데, 불천위 제사를 모시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자 고을의 위인을 모시는 행사로 고을의 유림들이 참여해 진행된다.

예천권씨 초간종택에는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된 △예천권씨 종가별당(보물 제457호), △초간일기(보물 제879호), △대동운부군옥책판(부)고본(보물 제878호)의 보물 3점과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초간종택(중요민속자료 제201호) △예천권씨 종가문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70호)이 있다.

이 외에도 이곳은 초간과 연관된 문화재가 많아서 학생들에게 우리나라 충효정신을 비롯한 선비들의 생활을 이해하는 역사·교육현장으로서의 역할로 활용가치가 높다.

초간선생은 초간정을 짓기 전부터 자신의 호를 '초간'이라고 했으며 초간이란 선계 권용이 쓴 초간정사 사적과 박손경이 쓴 중수기문에 '당나라 시인 위응물의 저주서간이란 시의 홀로 물가에 자라는 우거진 풀을 사랑하노니'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이상만 기자
이상만 기자 smlee@kyongbuk.com

경북도청, 경북경찰청, 안동, 예천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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