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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스토리] 스스로 간첩 된 탈북여성 김련희씨

"나는 공화국 사람…인도적 송환땐 남북 화해 모범사례 될 것"

배준수 기자 baepro@kyongbuk.com 등록일 2016년02월28일 21시23분  
▲ 지난 17일 오후 대구 중구의 한 카페에서 북한이탈주민 김련희씨가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 하고 있다. 유홍근기자 hgyu@kyongbuk.com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개성공단이 폐쇄 되고, 유엔이 강력한 대북 제재 결의를 하는 등 남북간에 강대강 대결양상이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남북 관계에 탈북자 등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개개인의 심정을 어떨까. 경북일보는 연중기획 '사람이다 문화다-휴먼스토리'로 평양서 당비서로 있는 아버지, 어머니는 신경과 의사 출신, 남편은 김책공대 의사, 외동딸은 요리를 배우는 대학생인 김련희씨(47)의 기구한 사연을 소개 한다.

2011년 남한에 온 김씨는 북으로 돌아가기 위해 스스로 간첩이 됐다. 그녀를 만나 남북분단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깊은 생채기로 아픔을 주는지를 들어봤다.

북한 평양에 있는 아버지(76)는 당 비서, 어머니(72)는 신경과 의사 출신. 남편(50)은 김책공업종합대학병원 의사이고 외동딸 리금련(21)씨는 요리를 배우는 대학생이다. 해외 언론이 찍은 동영상이나 페이스북 사진과 텍스트로 안부를 주고받는다.

2011년 남한에 온 김련희(47)씨는 북으로 돌아가기 위해 스스로 간첩이 됐다. 중국 선양주재 북한영사관의 지령을 받고 국내 거주 탈북자들의 동향을 수집해 넘기려다가 적발돼 집행유예형을 선고받았다.

남한 생활 5년을 보낸 그녀는 지금 통일부와 적십자사, 국가인권위원회 등을 찾아다니며 "고향으로 보내 달라"고 울부짖고 있다. 미사일 기술을 활용한 로켓 발사로 남북관계가 첨예해 지고 남북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마저 만신창이가 된 지금 김씨의 소원은 더 요원해져가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나를 인도적 송환하면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어주는 모범사례가 될 것"이라고 했다.

△스스로 선택한 간첩

기자는 김련희씨가 경북경찰청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고 검찰을 거쳐 재판에 넘겨지는 과정을 가장 먼저 알고 보도했다. 분명히 여자간첩쯤 되는 사건이었는데, 뭔가 석연찮았다.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범 김현희와 같이 샤프하게 생기지도 않았고, 외국어에도 능통하지 못했다. 인명 살상 훈련을 받은 매서운 눈매도 아니었다. 간첩 같은 행동을 하긴 했는데, 사전에 신변보호경찰관 등에게 자신의 범행을 미리 알리기도 했다.

경찰 내부에서도 '간첩은 간첩인데 좀 덜 떨어졌다. 우리가 아는 간첩과 다른 케이스'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김련희씨는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꾸민 일"이라고 털어놨다. 김씨는 간경화를 앓던 2010년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시 친척집에서 요양을 하던 중 치료비를 벌기 위해 나간 식당에서 브로커를 만났다고 했다.

한국에 가면 큰돈을 벌 수 있고 6개월만 지나면 중국 등지로 나갈 수 있는 여권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6개월만 돈을 벌고 다시 북으로 되돌아갈 심산이었다.

라오스와 태국 등지를 거쳐 2011년 9월16일 남한 땅을 밟았는데, 탈북 동료로부터 "다시 북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입국 후 국정원에 호소했다. 북송시켜 달라고. 국정원은 그런 선례도 없고 돌아가면 죽임을 당할 수 있다며 김씨의 요구를 거절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정착해 살아가겠다'는 서약서를 썼더니 그제서야 하나원으로 보냈다.

2012년 1월 우여곡절 끝에 경북 경산에 있는 임대아파트에 정착했다.

정착 6개월 만에 여권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입국 당시부터 북송을 요청했던게 화근이 됐다. 언제라도 북으로 달아날 수 있는 요주의 인물이 된 것이다.

북한 영사관에 전화해서 북으로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 중국까지 오면 공화국으로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중국으로 밀항할 2천만원이 없어 포기했다.

'간첩이 되면 죗값을 치르고 강제추방 당할 수 있다'는 엉뚱한 궁리를 짜낸 김씨는 그대로 실행했다. 간첩이 된 것이다. 가만히 있다가는 북에 있는 부모님 임종도 못 지키겠다는 생각이 들자 미칠 것만 같아서 다급했던 것이다.

대전의 한 다방에서 기사로 일하면서 그곳에서 알게 된 탈북여성 20여명의 정보를 모았다.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이다. 여권위조도 시도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경찰에 알렸다. 자수를 택했다. 그런데 간첩죄로 처벌받고도 그녀는 추방되지 않았다. 절망했고, 수차례 자살도 시도했다. 김씨는 "스스로 간첩이 됐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합법적으로 북한에 가기로 마음을 바꿨다"고 했다.

△판문점 통해 가족에 되돌아가는 게 꿈

작년 8월 14일 김련희씨는 뉴욕타임스를 장식했고, 여러 언론에 등장해 2만7천여 북한이탈주민 중 유일하게 북한으로 보내달라고 애원한 탈북여성이 됐다.

지금도 김련희씨는 북송을 간절히 소망하는 탈북여성으로 언론에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

지난 17일 대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씨는 다큐멘터리영화 제작팀과 함께 나타났다. 기자와 인터뷰하며 나눈 이야기를 모조리 영상으로 남겼다.

김씨는 지난해 12월 20일 어머니 칠순에 맞춰 손수 수를 놓아 마련한 선물을 보냈고, 딸 련금이가 "엄마가 보내준 머플러로 따뜻하게 겨울을 났다"는 회신도 받았다고 했다.

자신을 구속시키고 특별승진한 경북지방경찰청과 경산경찰서 경찰관 2명을 비롯해 자신의 북송을 가로막고 있는 국정원, 통일부 관계자에 대해서도 이제 미움과 원망의 마음을 비웠다고 했다.

다만 그녀는 '북으로 돌아가면 북한은 체제선전에 활용할 것이고, 2만7천여 탈북자들에게 후폭풍이 생긴다. 김련희를 선례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통일부 간부의 말에 억장이 무너졌다고 했다.

북송을 주장하는 김련희씨의 소식을 들은 탈북자들도 두 갈래로 나뉜다.

김씨 때문에 "국정원과 경찰의 감시가 더 심해져 생활에 불편을 겪는다"는 쪽과 "합법적인 인도적 북송의 첫 사례가 돼 달라"고 응원하는 쪽이다.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평양이 집이기에 북송을 요구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녀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 10년간 지방에서 쓰라린 고통을 겪었다. 가족이 평양에 살고 있을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3남매 중 맏딸로서 남편과 딸보다 더 부모님이 소중하고 그립다는 김씨는 "내 목숨을 가져간다 하더라도 부모님 얼굴 한 번 보고 죽고 싶을 뿐이다. 그게 최대 소원"이라고 거듭 반복했다.

최근 첨예한 남북관계를 풀 실마리로 자신이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되돌아가기를 희망하고 있는 김씨.

"누군가가 밀항을 시켜준다면 응하겠느냐"는 기자의 기습질문에 "당장 그러겠다"고 했다. 의외였다. 대신 그녀는 "목숨은 버려도 생이별한 가족은 못 버린다. 난 북조선에 있는 가족을 그리워하는 북조선 사람, 공화국 사람이다. 제발 보내 달라"며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휴대전화 끝번호가 '4150'인데 "김일성 수령님의 생일을 뜻한다"고 했다. 뼛속까지 평양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을 찬양·고무한 죄를 물어 다시 옥에 가둬도 상관없다고 했다. 그만큼 고향으로 가고 싶다는 뜻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김련희씨는 지난 24일부터 통일부가 있는 서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무기한 1인 시위에 들어갔다. 자신이 고향으로 인도적 송환이 될 때 1인 시위를 멈출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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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준수 기자

    • 배준수 기자
  • 법조, 경찰, 대학, 유통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