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은 시민정치의 승리 아전인수격 해석·변명 말고 현상 그대로 받아 들여야

정치는 누가 하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물론 답도 있습니다. 이번 4·13 총선을 보면 정치는 시민이 하는 겁니다. 가히 황금분할이라고 할 만큼 절묘한 이번 투표 결과가 그렇게 말합니다. 투표는 최고의 정치행위입니다. 그것을 통해 시민이 정치를 한다는 것이 하등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그렇게 해 오질 않았습니다. 정치꾼들에게 '아무런 생각 없이' 맡겨왔습니다. 그 결과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에 도달했습니다. 시민들이 '종이 돌(투표용지)'을 들고 나섰습니다. 그 돌에 맞은 자들의 선혈이 낭자합니다. 4·13 총선은 위대한 시민 정치의 승리였습니다.

이번 선거 결과를 두고 이런저런 해석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번 선거의 백미(白眉)는 뭐니 뭐니 해도 호남표의 일대 결단과 대구와 부산에서의 야당세 약진입니다. 거의 혁명 수준입니다. 나머지 '놀랄만한' 선거 결과는 그것에 비하면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합니다. 당연히도 이번 선거 혁명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향후 영향에 대해서 갖가지 설들이 난무합니다. 대개는 자기편의 입장을 앞세운 견강부회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웃기는 것이 책임회피성 얼토당토않은 숫자 놀음입니다. 몇 표, 몇 프로를 얻었으니 우리가 몇 등이고, 그 정도면 또 전혀 지지를 얻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라는 식의 못난 아전인수를 하는 겁니다. 선거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만한 이들이 공연히 그런 작태를 보입니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런 식의 못난 변명은 오로지 '보지 못하는 자'들의 전유물일 뿐입니다. '확연이대공 물래이순응(擴然而大公 物來而順應·확연히 크게 공정하여 만사 사물이 왔을 때 그대로 받아들여 따를 뿐이다)'을 모르는 '바보들의 합창'일 뿐입니다. 보이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그것에 따르면 될 터인데 그러질 못하는 것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해석과 변명'에 몰두하는 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오직 후회뿐입니다. 이번 선거의 요점은 간단합니다. 이제 정치는 시민들이 하겠다는 겁니다. 다시는 정치꾼들에게 정치를 맡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수십 년 동안 우리를 옭아매었던 '엉겨 붙기 식의 샤머니즘'(김윤식 교수의 표현입니다)과는 아예 깨끗이 헤어지겠다는 겁니다. 쓰라린 배고픔의 기억도, 매캐한 최루탄의 기억도, 철지난 공분도, 새로운 시대의 시민의식은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산업화든 민주화든, 죽은 아버지를 팔아서 자신의 부귀를 사려는 못된 자식들에게는 다시는 정치를 맡기지 않겠다는 겁니다. 천도(天道)만 무친(無親)인 것이 아닙니다. 민심도 가차가 없습니다. 천도든 민심이든 거두고 버리는 일에는 인정이 없습니다. 4·13 총선 결과가 그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추신 : 다른 이들을 억누르고 침범하는 씩씩함, 자신의 허물을 감추고 남의 허물을 파헤치는 씩씩함을 주역은 '장우지(壯于趾)'라 말합니다. '발꿈치에 씩씩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궁해질 행색입니다(初九 壯于趾 征凶有孚)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268쪽'. 해석을 앞세워 그저 남을(특히 형제나 동지를) 흠잡는 '장우지'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시민이 보여주는 수준 높은 정치에 '물래이순응'할 때입니다. 부디 자기를 죽이십시오. 다른 것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살 것입니다, 우리 모두.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