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태타는 자기애의 대상 사회적 관계 파열음 조장 건전한 사회 기여는 없어

'장자(莊子)'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성인(聖人), 지인(至人)에서 백정, 도둑까지 온갖 인물들이 총망라 됩니다. 애태타(哀駘它)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노(魯)나라 애공(哀公)이 중니(仲尼)에게 물었다. "위(衛)나라에 추남(醜男)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애태타라 합니다. 그와 함께 지낸 사내들은 따르면서 떠나지를 못하고, 그를 본 여자들은 <다른 이의 아내가 되느니 차라리 그 분의 첩이 되겠다>고 부모에게 간청한다 합니다. 그 수가 몇 십 명으로 그치지 않는다는군요. 그가 자기 의견을 주장하는 걸 아직 아무도 들은 적이 없고, 늘 남에게 동조할 뿐이라 합니다. 군주의 자리에 있어 남의 죽음을 구해주는 것도 아니요, 쌓아둔 재산이 있어서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는 것도 아닌데, 게다가 그 흉한 꼴이란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이며, 동조하기는 하지만 주장하지 않고, 지식 역시 사방 먼 곳까지 미치지는 못한다고 하는데, 그런데도 남녀가 그 앞에 모여드는 까닭은 필경 범인(凡人)과 다른 데가 있어서일 게요. '중략' 그는 어떤 사람일까요?" ''장자', '덕충부(德充符)', 안동림 역주, '莊子' 참조'

장자는 애태타가 사람을 끄는 이유를 '재능이 온전하고 덕이 겉에 나타나지 않는(才全而德不形)' 것에서 찾습니다. '재(才)'는 하늘에서 준 것이고 '덕(德)'은 스스로 이룬 것입니다. 그러니까 '재전(才全)'이라 함은 천성이 외물(外物)로 인해 전혀 손상되지 않은 상태를 뜻하는 게 됩니다. 애태타가 바로 그런 '재전(才全)'의 경지에 이른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흉한 외모조차 그의 약점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위자연을 내걸고 내면의 근본을 중시하자는 장자의 주장입니다. 일부 수긍하면서도 저는 이 주장에 대해 약간의 반발심을 가집니다. 애태타의 캐릭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애태타와 유사한 성격을 지닌 인물을 실생활에서도 종종 만납니다. 섣불리 주장을 내걸지 않고 마지못해 동조하는 일에 능하며, 용모가 출중한 편도 아닌데 여성들로부터 인기가 많고, 대인관계의 진정성과 의리관계가 분명히 확인된 것도 아닌데 '준 것 없이' 주변의 호평을 받아 내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일견 '재전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도 보이는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 경험 속에서는 그런 인물들이 사회에 좋은 기여를 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닌 말로, 장자가 묘사하는 애태타의 면모는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들의 위장전술과도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 관점에서 보면 애태타가 하는 일이란 고작해야 각자의 '내 안의 나르시시즘'을 크게 위무하는 일에 불과합니다. 애태타는 자기애의 대상이지 대상애의 대상이 아니라는 거지요. 한 도저한 나르시시스트의 위장전술을 장자가 그렇게 옹호한 까닭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 자신 역시 속 깊은(?) 나르시시스트였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무리 도저(到底)해도 나르시시스트들의 위장전술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들도 인간이기에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냅니다. 그때는 주변의 모든 사회적 관계에 파열음을 내며 큰 상처를 만듭니다. 모두들 그가 만들어낸 파국, 파탄의 피해자가 됩니다. 애태타가 인정받고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회는 건전한 사회가 아닙니다. 내 주변의 친구 중에서 혹은 좋아하는 정치인 중에서 행여 '나의 애태타'는 없는지 다시 한 번 잘 살펴볼 일입니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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