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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힐링처- 십승지의 재발견] 3. 예천 금당실

"소박한 고택 마을…온화한 기운 내뿜고 옥토 널린 명당촌"

김정모기자,이상만기자 등록일 2016년06월20일 21시31분  
▲ 예천군 용문면 전경.
예천군이 금천, 내성천, 낙동강이 감싸는 물의 도시(경북일보 2015년 6월 5일자와 6월 11일자, 낙동강을 가다)지만 용문면은 물이 풍부한 수덕지향(水德之鄕)이다.

이 용문면에 십승지에서 자주 거론되는 금당실 마을이 정좌(正坐)하고 있다. 십승지 금당실은 넓게 봐서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하금곡리 일대다. 남사고의 십승지는 금당실 북쪽이라고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그래서 십승지를 선리 원류리 사부리 중 어느 한 곳으로 좁혀 지목하기도 한다.

예천공설운동장(동본사거리)에서 북서쪽으로 약 7km정도 가면 나오는 곳이 상금곡리다. 산들이 마을을 빙 둘러싼 분지 형상이다.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로 정하려고 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금당실마을은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에 의해 '생활문화체험마을'로 선정돼 민속마을의 모습을 온전히 갖추고 있다.

조선 최고의 예언가이자 풍수지리가인 남사고는 금당실과 맛질을 하나로 보면 한양과 유사하나 강이 없어 아쉬워 했다고 한다. 백두대간 자락에서 흘러나오는 한천과 금곡천은 주변에 옥토를 만든다. 경북지방에는 '금당맛질 반서울'이라는 얘기가 있다. 한천과 한천의 상류인 금곡천 사이에 있는 두 마을을 말한다. 전형적으로 산수(山水)가 교합하는 마을이다. 금당실과 맛질사이 작은 고개에는 금당맛질 반서울이라는 자연석으로 만든 비석을 세웠다. 백두대간 묘적봉에서 발원해 내성천과 합류하는 한천 중류에 맛질(용문면 대제리) 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에 지금은 명맥이 끊겼으나 일제강점기까지 있었던 하화탈춤놀이와 같은 '맛질별신굿'이 전해올 정도로 유서 깊은 마을이다.

금당실은 윗금당실(상금곡리)과 아랫금당실(하금곡리) 모두를 일컫는다. 보통 금당실으로 불리는 상금곡리는 농촌 마을로는 보기드물게 커서 행정적으로 동촌 서촌 남촌 북촌의 4개리로 나눈다. 세 갈래 중 가운데 줄기인 오미봉 아래부터 남쪽으로 향하는 혈맥을 따라 북촌 동촌에 오래된 가옥들이 많다.

금당실의 특징은 나지막한 돌담과 구불구불한 골목길이다. 그리고 으리으리한 여느 양반 고택과는 달리 소박한 고택이 있다. 금당실의 고샅길을 따라 걸으면 돌담이 정겹게 동행한다. 주택 사이를 미로처럼 이어주는 돌담길이 옛모습 그대로다. 옛 날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북촌과 동촌은 내부적으로 순환하는 길이다. 길에 서면 조선시대 온 듯한 고상한 느낌이 생긴다. 풍광이 아름다운 금당실 마을은 영화 씨받이(1970년대) 영어완전정복(2003), 나의 결혼원정기(2005), 그해 여름(2006), KBS 드라마 황진이(2006) 등을 촬영한 곳이다.
▲ 병암정.

금당실 동촌과 남촌 서촌 삼거리에 용문면사무소가 있고 그 앞에 4~500년 된 느티나무가 마을의 수호신격으로 있다. 원래 있었던 3그루의 느티나무와 연못(금당)은 일제가 없앤 것으로 추측된다. 그 연못이 있어 금당실인지, 금당(金塘)이 있어 금당실인지는 명확하지 않을 것이다. 상금곡리는 풍수지리적으로 물에 떠있는 연꽃을 닮았다(연화부수형) 하여 금당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한다

마을 안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명당수인 실개천은 70년대 새마을사업때 시멘트 콘크리트로 복개했다.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되는 마을 앞에 연못을 다시 조성하고 느티나무를 심었으면 좋겠다. 명나라 장수가 이곳을 중국의 양양 금곡과 지형이 닮았다고 했다는 설이 있다.

금당실은 마을 주변에 고인돌 등이 산재해 있어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이 산 오래된 마을이다. 전형적인 농촌이다. 감천문씨의 사위인 함양박씨와 원주변씨가 대성을 이루며 금당실도 번성했다.

상금곡리는 대한제국 법부대신 이유인의 저택 터를 비롯해, 조선 숙종때 도승지인 김빈의 반송재, 사괴당 등 고택이 여러 채 남아 있다. 전통 한옥들은 주로 북촌과 동촌지역에 분포되며 서원과 사당을 포함하여 15곳에 이른다. 금곡교회는 1900년대 초에 세워져 경북 기독교사에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금당실 마을에서 또 하나 볼거리는 천연기념물 제469호로 지정된 금당실 서북쪽의 소나무 숲(송림)이다. 일종의 수구막이로 인공조림인 금당실 쑤(藪)다. 예부터 마을사람들은 솔둥지라 했다. 금당실 오미봉(옴봉산) 아래에서부터 용문초등학교 앞까지 약 800m에 걸쳐 소나무 900여 그루가 울창하게 조성되어 있다. 수령이 약 130~200년 된 조경림이다. 이 송림은 원래 아랫금당실(하금곡동) 마을 입구까지 소나무 숲이 조성이 될 때는 그 길이가 오리(2km)에 달해 장관을 이루었으나, 1892년 마을에서 목재로 팔기위해 벌채해 많이 훼손 되었다.
▲ 초간정.

금당실 마을 들판을 사이에 두고 서쪽으로 800m쯤 가면 죽림리에 예천권씨 종택이 있다.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인 초간 권문해의 조부인 권오상이 지은 별당(보물 제457호)과 권문해가 지은 안채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조선 중기 사대부 집안의 품격이 잘 드러나 있다.

금당실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마을 지형을 보고 깜짝 놀란 뒤 "(마을 뒷편) 오미봉(五美峰)의 산세를 보아하니 금당실에서 인재가 많이 날 모습이다. 장차 중국에 해를 끼칠 것이니 무쇠말뚝을 박아 산의 맥을 끊어라"라고 지시했다는 것. 금당실마을에는 함양박씨를 비롯해 조선시대 대과에 급제한 사람만 15명이나 됐다고 하며 지금에도 각계에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예천권씨 권맹손 권오복에 이어 현대에도 권영자 권두영 등 중앙에서 두드러진 인물이 많다. 용문은 이 나라 민권운동에 공헌한 인물도 배출했다. 척왜(斥倭), 안민(安民)의 반외세 반봉건을 내건 동학군 지도자 전기항. 오미봉 뒷산에 유택이 있다.

금당실에는 옛 부터 빼어난 인물이 났으나 아랫금당실(하금곡리 개금자 마을)에 정 탁 대감이 대표적. 조선의 명재상 약포(藥圃) 정탁(鄭琢)은 외가인 이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살았다. 이순신이 어명을 어겨 옥에 갇혔을 때에는 유명한 상소문 '신구차 (伸救箚)'를 우의정으로서 올려 사면토록 했다. 이순신은 훗날 '나를 추천한 이는 서애요, 나를 구해준 이는 약포'라고 말한바 있다. 분조(分朝) 받은 세자(광해군)를 호종(扈從)하며 군사모집과 작전지휘, 의병장을 격려했고, 시국수습책을 행재소(行在所·임금이 머문 곳)로 보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용사일기'가 전해온다.

하금곡리는 강직한 정탁이 태어난 마을답게 지세가 작지만 당당하다. 망월봉(424m) 육녀봉(263m)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잡았다. 하금곡리는 조산 매봉(865m)을 향해 당당히 마주해 앉은 회룡고조(回龍顧祖)형이다.

금당실을 두 번이나 샅샅이 살펴본 여행작가 정기조(55·대구지산동)씨는 "전국을 대부분 다녀봤지만 마을이 온화한 기운을 내뿜고 옥토가 널려 있는 곳은 잘 보지 못했다"며 "십승지 명성대로 명당촌"이라고 말했다.

1751년 이중환이 편찬한 '택리지' '복거총론(卜居總論)'은 백성들이 살 만한 곳을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 등 네 가지 기준으로 골랐다. 살 만한 곳에 4대항목이 평가요소라는 얘기다. 금당실은 지리, 생리, 산수는 지금도 유효하다. 하지만 인심은 때때로 바뀌는 법이다. 진정한 승지로 지속가능하려면 인심을 계속 갈고 닦아야 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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