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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수 년 전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 책이 열렬한 호응을 받았던 까닭 중에는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식의 자기위안적 보상심리도 분명 있었을 듯합니다. 몹시 바라는 데도 제 손아귀에 쏙 들어오지 않을 때에는 아예 무시해버리거나 경멸하는 게 상책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예나제나 돈은 우리의 최대 관심사입니다.

돈에 대해서는 일찍이 다산 정약용 선생도 한 말씀 하신 적이 있습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돈 무용론’을 펼쳤습니다. “우리나라에 돈이 사용된 지는 이제 1백 40여년이 된다. 맨 처음 오영청에서 쓰기 시작하여 수원과 강화에까지 파급되었으며, 드디어 태농(太農)에서 주조한 돈으로 탁지(육조 가운데 호조를 말함)의 비용을 충당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수천 년 동안 막혔던 풍속이 이제 확 트이게 되었으니, 의당 백성들이 생업에 풍부해지고 국가의 재용이 넉넉해져야 할 것인데도, 어찌하여 1백여 년이래 공사(公私)의 창고가 모두 고갈되고 남북의 재화가 유통되지 않음으로써, 조그마한 이익을 다투어 풍속이 나날이 각박해지고,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져서 벼슬아치의 탐내는 습관을 징계할 수 없는 실정에 이르렀는지 모르겠다. 진실로 그 까닭을 따져 보면 돈에 허물이 있는 것이다.(‘목민심서’)”라고 돈의 폐해를 지적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돈 없이도 물류의 유통이 원만하게 이루어져 왔는데 공연히 요물(妖物)을 만들어 나라만 더 어지러워졌다고 한탄했습니다.

돈 없이도 잘 살아왔다는 다산 선생의 주장을 처음 대했을 때는 참으로 엉뚱한 말씀이다 싶었습니다. 경제는 흐름인데 교환수단인 돈 없이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모하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니 전혀 일리가 없는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돈이 쓸데없이 사람의 욕심을 자극하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견물생심이라고, 돌이켜 보니 저부터도 돈의 최면에서 한 시도 벗어나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 멀리서 들려온 다산 선생의 말씀이 저의 주변을 한 번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연치 않게 마침 그때, ‘돈으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라는 말이 중년층에 접어든 친구들 사이에서 농반진반으로 떠돌기도 했습니다. 저도 그 말을 열심히 전파하고 다녔습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해야 좀 더 넓은 집, 좀 더 크고 안락한 차, 좀 더 태깔이 나는 비싼 옷과 신발, 좀 더 달고 기름진 음식을 가지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었습니다. 건강을 살 수도 없고, 자식 공부도 살 수가 없고, 가정의 화평도 살 수가 없고, 돈독한 우정도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돈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것들로 세상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요즘은 좀 달라졌습니다. 돈이 없으면 인생도 없습니다. 돈마저 없으면 그나마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도 알뜰하게 챙길 수가 없습니다. 나이 들어 돈에 궁핍해지면 젊을 때와는 달리 일말의 자작(自作) 여유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절박감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행복감을 이식할 공간이 점점 협소해지기에 돈의 역할이 부득불 커집니다. 반드시 어느 정도는 돈을 꼭 가져야 합니다. 쌀독에서 인심난다는 말은 몸으로 봉사할 일이 사라지는 노년에서는 정확히 진실입니다. 자식이 공부를 못해도 돈이 있어야 당분간이나마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돈 없으면 이웃들에게 베풀 인심마저 고갈됩니다. 살다가는 기념으로 후생(後生)들에게 무엇 하나 남기겠다는 염은 아예 품을 수도 없습니다. 삼식이 소리나 들으며 말년을 구박 속에서 보내야 합니다. 돈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래저래 돈이 관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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