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한 마리

갑자기 말이 없어진다

풀 옆으로 다가가 풀을 뜯는다

자리로 가서

부끄럼도 모르고

아주 잠깐 은밀하게 남의 것을 쉽게 뜯고 먹는다



하루 종일 자기를 질겅질겅 밟아야

밥이 먹어지는데

질겅질겅 밥을 밟고 서서

밥을 먹는다

하얀 것들은 밥 앞에서도 막막해지지 않는다



양 한 마리

밥을 만지는 입이 둥글고 아름다워 보인다

목화솜처럼 하얗게 생겼지만

아주 잠깐 남의 긴 풀을 베어간다

저 불량한 식사를 위해

양은 노래할 입이 없다



풀에겐

새하얀 공포

얼음 같은 입

너무 하얀 것들을 나는 믿지 않는다





<감상>오늘 아침 내가 마신 물 한 잔은 어느 바위 틈 어느 나무뿌리 아래 아니면 어느 구름 위에 웅크리고 있던 한 모금의 물인가, 내가 마신 한 모금은 돌의 양식이었을까, 하늘의 양식이었을까, 자꾸만 헤아리게 되는데 물을 마시면 내가 물이 된 듯, 하얀 것을 먹으면 나도 하얘질 것 같은, 그래서 무엇이든 나는 믿는다. (시인 최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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