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환 계명대학교 교수
11월 12일 저녁 대구백화점 앞에 설치된 ‘A4 지로 누구나 하는 데모’ 게시판에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퇴근혜(退槿惠)”라고 적힌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글씨체로 봐서 고등학생이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것 같았다. 토요일 촛불집회에는 고등학생, 대학생, 아주머니, 아저씨 모두가 나섰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딱 부러진 이유는 없다. 그것은 아무 이유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국민은 마음속에 있는 이 모든 거짓과 찌꺼기를 태워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역사상 없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다. 평소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할까(이것은 최근 알게 되었다), 버스는 타봤을까, 신용카드 사용법은 알고 있을까 등등이다. 이런 신변잡기는 차치하고, 정말 내가 궁금했던 것은 정상회담을 할 경우 박근혜 대통령은 다른 나라 대통령들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어떻게 대화를 이어갈까. 협정이나 MOU 등 외교문서의 내용은 이해하고 서명을 할까, 등에 대한 의문을 떨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렇다.

박근혜 대통령이 정치인 시절부터 지금까지 누군가 적어준 원고를 보며 읽는 모습 밖에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즉석연설을 하거나 시나리오에 없는 질문에 답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국무회의의 모두발언은 말할 것도 없고, 신년기자회견 등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대답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질문을 미리 받아서 정해진 답을 한 경우는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항상 말이 없다. 손을 흔들고 웃음 짓는 모습이 전부이다.

어쩌다 즉석에서 하는 뜬금없는 한마디는 우리를 아연실색게 한다. 기자의 질문에 “어디 아프세요”라거나, 어린아이들에게 “간절히 원하면 전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 등은 널리 회자되고 있다. 최근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국회를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자기가 ‘외워서 온’ 말과 요구만 쏟아놓고 돌아섰다. 13분간의 대화에서 대부분 정세균 의장이 말하고 대통령은 단답형 대답만 했다고 한다.

만약에 정상회담도 이런 식이라면 정말 문제다. 말이 없어도 우리끼리는 한국인으로서 이심전심으로 전해지는 바가 있으니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외국인을 만났을 때는 정확한 의사전달 없이는 소통이 안 된다. 공식적인 인사 정도는 적힌 대로 읽으면 될지 모르나, 논의를 요하는 부분은 그렇지 않다. 또 사적인 교류를 나누는 만찬 등에서는 풍부한 소양에 기초한 다양한 대화가 필요하다. 정상끼리의 사적 관계는 외교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대통령은 무슨 말을 하며 대화를 나눌까. 그냥 웃고만 있을까. 뜬금없는 말로 상대를 ‘압도’해버릴까. 자못 궁금하다.

국내문제는 잘못되면 고치고 수정해 갈 수 있다. 그러나 외국과의 관계는 한번 맺어지면 돌이킬 수 없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 파동 때를 보면 알 수 있다. 수입 쇠고기의 기준을 변경하는 협정문 조문을 하나 고치는데도 전 국민이 촛불을 들고 나서야 했다. 또 대통령은 나라의 얼굴이다. 말없이 웃고만 있는 대통령의 모습이 한국의 진면목은 아니다.

최근 대통령의 위치를 두고, 2선 후퇴, 내치와 외치의 분리, 하야, 탄핵 등 백가쟁명이 난무한다. 새로운 대통령을 찾아야 한다는 말로 요약된다. 하야는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고, 탄핵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불확실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야당이 쉽사리 꺼내 들지 못한다. 그러면 어쩔 것인가. 촛불을 계속 밝힐 수밖에 없는가. 대통령의 내치는 최순실 사건으로 이미 사망선고를 받았다. 남은 것은 외치이나, 그것은 더더욱 위험하다. 결국, 청와대에서 “퇴근혜”야 하는 것이 아닐까. 대통령으로서 마지막 책임을 다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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