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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원 화인의원 원장
지난 한 달여간 대한민국에선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수많은 인파가 매 주말 도심 집회현장에 넘실거렸다. 국내 정치사에서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그들이 외치는 구호는 너무도 간결했다. ‘정권퇴진’과 ‘집권당해체’다. 하지만 역대 정권 최악의 지지율로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것과 다름없는 박근혜 정권은 미동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덩달아 집권당인 새누리당 지도부는 성난 국민의 속만 뒤집어 놓았다. 더 꼴불견인 것은 실체도 없는 ‘숨은 지지층’ 운운하며 상황 반전을 통한 보수층 재집결을 도모하려는 속내를 공공연히 드러내 보였다.

어제 박근혜 대통령은 3차 대국민담화를 통해 대통령직과 관련한 자신의 처리문제를 국회에 맡긴다고 발표했다. 솔직한 반성과 구체적 퇴진일정에 대한 언급은 회피한 채 정국혼란의 수습 해결책을 국회로 넘긴 꼴이다. 현 정국의 혼란을 초래한 장본인으로서 참으로 비겁한 처신이라 할 수밖에 없다. 현 정치권이 과연 이 국면을 어떻게 해결할지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집권당인 새누리당의 그동안의 행태에 비추어 볼 때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현 정권 탄생과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 부역정당으로서 낙인찍힌 새누리당은 최근 원내정당 지지율에서 3위로 밀려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보수색채가 강한 우리의 정치지형에서 자칭 유일한 보수정당이 3위로 밀려난 적은 그 전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무엇보다 이번 사태의 핵심이 보수와 진보 간의 이념 다툼이 아닌 비양심적인 부패세력의 국정농단에 있다고 한다면 다수의 보수주의자는 지금의 새누리당을 진정한 보수정당이 아닌 비양심적 부패세력 집단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수주의는 프랑스혁명 당시 시민계급의 자유주의 이념에 대립하여 발생한 귀족계급의 정치 사상적 표현으로 처음 역사무대에 등장한다. 이후 19세기 후반 시민계급의 자유주의는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와 대립하는 보수주의로 다시금 자리매김한다. 이처럼 보수주의란 시대발전의 과정에서 급격한 변화보다는 기존의 법과 질서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점진적인 발전을 꾀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즉 개혁이란 큰 틀에서 보수와 진보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지만 방법에서만 선을 달리할 뿐이다.

현재 친박지도부로 구성된 새누리당은 진정한 보수정당이 아니다. 개혁에 대한 공감은 애당초 없었거니와 법과 질서를 지키려는 원칙은 헌신짝 버리듯 했다. 단지 개인의 탐욕적인 권력욕만 채우기에 급급했고 부정과 비리는 적극 동조 내지는 방관함으로써 기득권세력의 부패를 묵인해왔음이 이번 사태를 통해 확연히 드러났다. 이 지점에서 지금의 새누리당은 해체되어야 마땅하고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당위성이 확보된다. 새누리당의 붕괴는 결코 보수의 몰락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가짜가 아닌 진짜 보수정당을 건설할 절호의 기회다.

한국사회에 진정한 보수주의자가 없다는 여러 학자의 지적이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절대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전 국무장관인 헨리 키신저 박사는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은 사회투쟁을 하지 않는다. 화해를 통한 안정을 원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진정한 화해는 책임추궁과 처벌이 있고 난 후에야 가능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현재 새누리당 내에서 개혁을 주장하고 있는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의 인적청산 요구는 지극히 합당하다.

어떠한 방식이 됐든 국가와 민족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보수적 가치로 내건 진짜 보수정당을 이번 기회에 기필코 만들어야 한다. 더 이상 기회주의자가 현실적 보수주의자로 둔갑하게 두어선 안 된다. 어제 대통령의 발표문에 따라 이 정권에 대한 부조리함과 무능함에 대한 책임처리 문제가 정치권으로 넘어온 이상 앞으로 보여 줄 새누리당의 정치 행보는 진짜 보수정당 출현 가능성의 척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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