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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호 호서대교수 법학박사
요즘 “이게 국가냐?”라는 말이 회자된다. 국가권력의 사적유용 혐의로 촉발된 시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광장의 촛불은 발화 이래 9주째 들불처럼 활활 타올랐다. 오늘 타오르는 대한민국 촛불은 세상의 고통과 분노와 배제와 소외와 절망의 표시이다. 촛불은 아직도 태워야 할 많은 불쏘시개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촛불의 원초적 이마주가 진실하지 못하면, 광장의 불꽃 속에 잠복해 있는 인화성(引火性)의 물질은 스스로 격동을 억제하지 못한다. 촛불은 국가를 본디 불의(不義)하다고 평가한다. 대저 국가는 폭력을 행사하고 지배를 관철하는 데는 유능하지만, 생명을 사랑하고 살리는 데는 한없이 무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광장의 촛불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 모두는 절제와 평온함 속에서 숨 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폭력이요 아나키즘(anarchism)이 되기 때문이다. 촛불이 타는 순간은 정부의 상태가 일종의 아나키(anarchy)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나키’는 프랑스어로써 ‘선장이 없는 배’라는 뜻이다. 정부나 최고권력이 없거나 권력의 쓰임이 불법적인 데서 비롯한 무법 상태로서 정치적 무질서라는 뜻이다. 그러나 정부가 존재하지 않거나 아무런 통일적인 제도와 질서가 없이 단지 혼란한 무정부적 상태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행위를 규제하는 공통가치나 도덕 기준이 없는 혼돈 상태인 아노미와도 다르다. 아나키즘은 일체의 정치권력이나 공공적 강제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내세우려 한다. 그 때문에 광장의 촛불에서 아나키의 한순간을 관찰할 수 있다.

오늘날 국가주의를 탄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 기독교이다. 기독교는 일정한 정치이념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주의를 고착시켜 국가를 신성시하고 국가 지상주의를 지속시키고 있다. 국가주의는 법과 제도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일상화한다. 이에 따라 국가의 구성원인 국민은 국가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써 통치자의 지배대상이 되고 충성스런 신민으로 추락했다. 국가의 부속품이 되어 인권은 무참히 짓밟히고 인간의 존엄성은 한낱 허울 좋은 구호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국가폭력에 대항하고 폭력 없는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는 가운데 탄생한 것이 아나키즘이다.

항해 시 배의 운명은 선장이 쥐고 있다. 현재 아나키 상태의 대한민국호는 대행선장이 키를 잡고 있다. 그러나 야권은 선장이 없는 배는 주인 없는 것이 아니라 선원 모두가 배의 주인이라고 한다. 대행선장까지도 내려오라 한다. 선원 모두가 배의 키를 쥘 수 있는가? 선장이 없어도 선원 모두가 주인이므로 배는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 아니라 선원 모두의 의지대로 목적지를 향해 항해한다고 한다. 이게 가능할까? 선장과 선주를 오해하지 말라. 많은 국민은 배가 산으로 갈까 두렵다. 일단 항해를 시작하면 선장은 항해를 마쳐야 한다. 선장 없는 대한민국호의 승객들은 더 이상 뱃멀미를 원하지 않는다. 더 이상 배를 흔들어서는 안 된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크림전쟁에 참여하면서 국가폭력에 대한 분노와 삶에 대한 절망감에 시달렸다. 국가권력이 국민을 단두대로 처형하는 광경을 보고 허무와 절망 속에서 삶을 낙관하고 긍정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고 했다. 하물며 민초들은 어떠하겠는가? 광화문 촛불집회를 아나키즘의 한국적 발현으로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전국을 매주 촛불로 뒤덮을 수는 없다. 야권의 권력장악을 위한 세 치 혀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광장의 촛불을 끄는 유일한 대안은 정치적·경제적 배제로부터 시민들의 사회적 자존감을 회복시켜야 한다. 개헌을 통해 국가공동체 구성원들의 분노와 불만을 녹일 큰 그릇을 정치권이 신속하게 만들어야 한다. 자신들의 밥그릇 챙기기에만 급급하다면 시민들은 계속 촛불을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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