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어려운 국면에 처하면 역사를 되돌아 본다. 역사를 돌아보면서 치욕의 장면은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국론이 분열돼 내분이 일어나고 끝내 외세에 의한 굴욕의 역사를 되풀이 하는 경우가 있다.

병자호란이 대표적 예다. 광해군을 내쫓고 인조를 왕위에 옹립한 서인들은 망해가는 명과 친하게 교류하고, 새롭게 기틀을 다지고 있는 후금에는 뻣뻣하게 대했다. 그러자 후금은 1627년 광해군의 복수를 빌미로 조선에 형제 관계를 요구하며 침입했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힘이 약한 조선은 하는 수 없이 억지형제가 됐다.

이후 명나라를 친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형제에서 다시 신하가 되기를 강요했다. 이 때 조정에서는 청과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와 적당히 요구를 들어주자는 주화파로 갈렸다. 목소리가 더 높았던 척화파는 청을 야만적인 만주족이라 무시했다. 이 같은 대응에 화가 난 청은 1636년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왔다. 병자호란이 닥친 것이다.

당시 우리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한 장면이 전개된다. 유명한 ‘삼전도의 굴욕’이다.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교황에게 맨발인 채 눈 위에 무릎을 끓은 카노사의 굴욕 사건보다 더 참혹한 장면이다. 인조는 한겨울에 먼 길을 걸어서 삼전도에 있는 청 태종 앞에 가서 ‘3배 9고두’를 한다. 항복의 예로 상복을 입고 3번 큰절하고 9번 땅바닥에 머리를 찧어서 그 소리가 단 위에 앉은 청 태종에게 들리게 하는 것이었다. 인조의 이마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니….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탈당했다. 김 전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나라는 스스로 기운 뒤에야 외적이 와 무너뜨린다’. 병자호란 때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후 국론 분열을 미리 막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인조가 한 말이다. 안팎의 위기가 눈앞에 닥쳤을 때 정치가 대의명분만을 따져 국민을 분열시켜서는 안 된다”고 했다.

대통령 탄핵은 물론 사드 배치를 두고 보수와 진보로 국론이 양분돼 있다. 북한이 핵 위협을 가하고, 중국이 전방위 사드보복에 나서는 등 국제적 상황은 병자호란 때와 다르지 않다. 정치권은 치욕의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을 상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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