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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64. 함양 동호정(東湖亭)

탁 트인 물길 빼어난 절경에 세월도 잠시 쉬어가네

김동완 여행작가 등록일 2017년04월20일 20시14분  
동은 해동을, 호는 정자앞을 흐르는 금호천을 뜻한다.
함양 화림동 계곡의 정자 중에서 주변 경관과 짝을 이뤄 아름답기는 거연정이요, 정자를 둘러싼 경관이 빼어나기는 농월정이다. 동호정은 화림동계곡에서 가장 튀는 정자다. 거연정과 군자정이 자연미를 살린 소박한 건축으로 자연의 일부가 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화려한 단청에다 규모까지 화림동 계곡에서 가장 커 잔잔한 호수에 이는 파문처럼 또렷하다.

화림동 계곡은 계곡이 시작되는 거연정, 군자정을 지나면서 옥녀담에 이르러 수백평 규모의 넓직한 암반이 펼쳐보이는데 차일암(遮日巖)이다. ‘차일’은 세월을 막는다는 뜻이다. ‘지나가는 것이 이 물과 같구나, 밤낮없이 그치지 않는구나.”공자는 이렇게 세월의 무상함을 탄식했다. 천상탄(川上嘆)이다. 차일은 공자의 탄식보다 훨씬 공격적이다. 탄식할게 아니라 아예 오는 세월을 막겠다고 바위이름을 지었다.그러나 세월은 막는다고 막아지는 게 아니다. 바위 이름을 지은 이가 더 잘 알고 있다. 오히려 세월의 덧없음, 인간 존재의 나약함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반어법 일지도 모르겠다.

동호정명은 동호 장만리의 호에서 따왔다. 동은 해동을, 호는 정자 앞을 흐르는 금호천을 뜻한다.
동호정은 차일암 위에 우뚝하다.‘동호정’의 ‘동호’는 장만리의 호인데 ‘동東’은 ‘해동’, 즉 우리나라를, ‘호湖’는 ‘금호’를 말한다. 금호는 덕유산에서 발원해 화림동계곡에 들어오는 물줄기 이름이다. 임진왜란때 선조의 의주몽진을 도운 동호(東湖) 장만리(章萬里)가 소요하던 곳에 그의 9대손 장재헌이 1895년 건립한 정자다. 장만리는 선조 16년(1583) 통정대부 정릉령을 지내다가 선조26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몽진할 때 왕을 도왔다.비가 쏟아졌고 왜군의 선봉이 왕의 코 앞까지 쫓아왔다. 그때 장만리가 임금을 등에 업고 수십리 길을 달렸다. 이후 평양성 탈환 전투에서도 공을 세웠다. 임금이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영세불망자(永世不忘者)’라는 교지를 내렸고 호성원종공신에 책록됐다. 이듬해 행재소에서 4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충효비는 정자 인근에도 있고 거창 근계정 계곡 건너편에도 있다. 장만리는 벼슬살이를 하기 전까지 동호정 인근의 초현마을에 살았는데 차일암에서 낚시도 하면서 산수를 즐겼다고 한다. 바위에 ‘장처사가 낚시를 하던 곳 章處事釣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동호정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공자의 일대기를 그린 화판이다. 그림은 공자가 영면하는 장면.
동으로 흐르는 호수 물가에
이름난 곳을 찾아 얻고 새롭게 집을 지었네
돌과 샘에 인연있어 재빨리 착수하고
구름과 수풀에 욕됨이 없이 가히 이몸을 마칠가 하네
낚시대에 도롱이 입고 안개비 맞으며 보니
절벽에 핀 복사꽃은 옥동의 봄이로구나
바위굴에 있는 원학과 친구되기를 허락하니
성스럽고 밝은 세상에 오직 한가한 사람이라네
- 장만리의 시 ‘초현에 엎드려 살다’

동호정 안에서 내다본 화림동계곡은 앞에 있는 바위가 영가대이고 물은 옥녀담이다.
동호정이 들어선 차일암 앞 계곡에는 잘생긴 바위마다 이름이 하나씩 있다. 노래는 부르는 곳이라는 영가대(詠歌臺)와 거문고와 피리를 부는 곳 금적대(琴笛臺,) 술잔을 기울이는 주가대(酒?臺)가 있다. 영가대는 공자의 제자 증점이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에서 바람을 쐰 뒤 노래하며 돌아오리라‘던 풍류를 이어 받아 지은 이름이고 금적대는 거문고를 타거나 피리를 불며 자연의 일부가 되고 싶은 마음을 담아 지었다. 주가대에서 술을 마시며 신선의 경지에 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홀로 바위에 와서 앉으니
산은 고요한데 흰구름만 짙어가네
물은 꽉차서 넘쳐나는데
참된 근원은 이 가운데 있도다
망천의 냇가에 별업을 열었고
기산이 묏뿌리에 남은 풍치 우러르네
한곡조 풀의 노래가 그치니
곧 신선을 만나겠구나
- 장만리의 시 ‘차일암에서 노닐며’

▲ 동호정은 정면3칸 측면 두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2층누각 양식인데 정자의 왼쪽 측면에 출입계단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이다. 정자 안에는 정자 뒷부분을 막은 판벽이 남아있다. 정자 앞에서 보면 왼쪽에 통나무를 자귀로 깎아 계단을 만들어 누로 오르게 했다. 정자의 4면에 계자난간을 설치했는데 벽에서 30cm 바깥으로 연장해 공간을 넓게 활용했다. 기둥은 둥근 나무를 대강 다듬어 사용해 자연미를 살렸다. 평탄한 암반 위에 초석을 쓰지 않았다. 네귀의 활주는 긴 팔각석주를 아래에 두고 그 위에 나무기둥을 세워 마치 높은 하이힐을 신어 각선미가 돋보이는 여성모델처럼 날씬하다.

동호정 안의 단청은 화려하기 그지 없다. 대들보로 사용한 소나무는 거의 아름드리인데 굽은 그대로 사용했다. 대들보 위의 충량에는 용의 대가리가 조각됐다. 좌우 충량에는 청룡과 황룡을 조각했는데 황룡은 물고기를 물고 있고 청룡은 여의주를 물고 있다. 함양의 용추계곡에 있는 심원정에도 이와 같은 조각이 있다.

동호정은 동호 장만리의 호에서 따왔다. 동은 해동을, 호는 정자앞을 흐르는 금호천을 뜻한다.
대들보에는 두 마리 호랑이가 마주보고 포효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정자를 세운 이는 용을 새기면서 이곳이 입신양명의 등용문이라는 뜻을, 노력에 따라 입에 물고기를 무는 용이 될 수도, 여의주를 무는 용이 될 수도 있다는 암시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대들보에 호랑이를 그리면서 공부에 용맹정진해달라는 당부를 하고 싶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밖에 천정에는 커다란 화반을 조각하고 만개한 국화꽃을 그려놓았다. 조선의 선비들이 가장 좋아한 시인은 도연명인데 도연명은 특히 국화를 좋아했다. 그의 연작시 ‘음주’ 중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를 따며 멀리 아득히 남산을 바라보네彩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는 싯구는 선비들의 애송시였다. 국화의 계절인 가을에 편지를 쓸 때는 꼭 ‘채국동리하지절에 가내 두루 평안하신지요’라며 첫머리를 장식했다. 정자 안에는 중수기과 상량문 시판 상량문 등의 현판이 걸려있는데 정연갑이 쓴 상량문에 정자의 건축에 이르게 된 배경과 건축 당시 풍경이 자세히 나와있다.

차일암 영가대 각자. 오는 세월을 막고 노래를 부르리라는 뜻이다.
“군자가 숨어 묻혀 살 곳을 점찍을 때는 먼저 숲과 샘이 좋은 곳을 택하고 충신이 절기를 세울 때는 반드시 지주가 굳세야 함이니 진실로 창건의 넓은 본받음이 없다면 어찌 출처의 대의를 칭하리요. 그윽히 생각하건데 높은 충채와 위엄과 열정은 참으로 뒷 사람이 평가해 말할 바가 아니다. 정직과 충효와 이치를 배우고 난 뒤 일찍이 이 마을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호를 동호라고 하니 동은 해동이요, 호는 곧 금호니라. 백운산의 동W고 맥이 구비쳐서 형국을 열었으니 황석산의 남쪽 다리가 구불구불 이어진 모양이 장호암과 차일암이라. 사시에 노닐고 구경하기 알맞고 주가대아 금적대에는 모두 여러 ANT 사람이 등임하니 푸른 이끼 조대위에 어가를 서로 화답하고 복사꽃 기슭아래 술잔이 마주치며 여러 봉우리를 끼고서서 그림의 주렴을 구름 밖에 펼쳤다. 급히 흐르는 물 부딪치며 돌아서 큰 종을 석상에 걸었으며 브드러운 풀 양지쪽에 사슴들과 함께 잠들었다.”

글·사진 김동완 여행작가
특히 정자에서 눈길을 끄는 현판은 공자의 일대기를 그린 화판이다. 공자의 탄생과 강학 장면, 사망장면까지 세세하게 그려져 있다. 공자의 강학장면을 그린 화판은 남계서원의 강학당이 명성당에도 걸려 있는데 정자가 단순히 놀고 마시는 유흥의 공간이 아니라 학문을 갈고 닦는 장소임을 역설하는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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