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음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장욱진의 ‘작은 그림’이었습니다. 선생은 평생 작은 그림만 그렸습니다. 흔히 소품(小品)이라 부르는 4, 5호 정도의 그림만 그렸습니다. 곤궁했던 이중섭이 캔버스를 마련치 못해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던 것을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장욱진의 작은 그림은 곤궁의 결과는 아니었습니다. 남은 자료와 증언에 따르면 그는 무릎을 세우고 앉은 자세로 그림을 다리 사이에 끼워 놓고 그렸다고 합니다. ‘완벽하게 자신의 통어 아래 있는 작품’을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작은 공간 안에 해, 달, 나무, 새, 아이, 집을 그려 넣었습니다. 이를테면 자신이 만든 우주 속에 필수적인 삶의 원형적인 표상들을 채워 넣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것만 그렸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6·25 전쟁 중에 고향(현재 세종시)에 내려가 그린 ‘자화상’은 가방과 우산을 든 자신의 외양이 그림의 중심을 차지합니다. 그렇게 (화려한 모습으로?) 고향으로 돌아오는 화가를 뒤따르는 개 한 마리와 몇 마리의 새들, 그리고 길게 뻗은 (논 사이의) 길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습니다. 왜 좋은가? 그런 질문을 뛰어넘는 것이 진정한 예술품이라고 흔히 말합니다만 이 작품을 처음 보는 순간 그 진부한 예술론이 바로 떠올랐습니다. 예술은 사람의 몸을 빌려서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는 말도 같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나로서 족하니 남과 비교하지 마라. 비교하면 갈등과 열등의식이 생기고 자아가 망가진다. 그림이란 자아의 순수한 발현이어야 하는데, 비교하다 보면 절충이 돼 나 자신은 사라지고 만다. 남을 인정할 것은 다 인정하고 자기는 자기로서 독립할 수 있어야 한다. 나를 찾고 나를 지켜라. 자유에로의 길이 거기 있다”
장욱진 선생이 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술가로서 ‘자유’를 잃지 않는 수행 방법이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서로 다른 것을 사랑하라”라는 말씀과도 일맥상통하는 말씀입니다. 타인에게는 사랑과 봉사로 대하되 스스로에게는 조금의 나태와 방만도 용납하지 않는 몰입의 삶을 유지할 때 비로소 진정한 예술이 가능하다는 가르침입니다. 비단 예술만이 아닐 것입니다. 정치든, 교육이든 ‘자유’를 잃고 나면 모두 짐승의 것이 되고 맙니다. 장욱진의 100년 삶이 그런 ‘삶의 일반적 진실’을 여실히 증명합니다. 자유롭게, 아무쪼록 후회가 남지 않도록, ‘모든 가진 것을 다 쓰고 가는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희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