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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77. 예천 초간정(草澗亭)

기암 위 절묘하게 내려앉은 정자…자연과 하나가 되다

김동완 여행작가 등록일 2017년07월20일 18시48분  
초간정은 계곡 암밤에 막돌을 쌓아 만든 기단 위에 세워졌다.

예천에는 경관이 빼어난 정자가 여럿 있다. 거대한 암벽 위에 서 있는 병암정(屛巖亭)은 둥근 연못에 촘촘히 고개를 내민 연꽃이 눈부시고 연못 안에 조성한 둥근 섬과 섬안의 소나무가 눈길을 끈다. 도정서원에 있는 읍호정(?湖亭)은 내성천변 백척간두에 위엄을 갖추고 서 있다. 정자 안에서 아득하게 내려다 보는 푸른 강이 장관이고 정자와 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서원입구 오솔길에서 보는 풍치는 감동적이다.


그러나 풍광을 꼽으라면 역시 초간정이다. 오래된 소나무 숲이 하늘을 찌를 듯 우거졌고 숲 사이에 살짝 자태를 드러내는 정자는 가을 국화처럼 고절하다. 계곡은 자동차 한 대 지나갈 정도의 폭인데 물이 깊고 물이 지나는 소리는 소란하고 고요하다. 초간정은 반전의 매력이 있다. 초간정 앞을 흐르는 계곡은 소백산 자락의 용문산에서 내려온 물이다. 운암지와 금당지에 머물렀다가 초간정을 지나 내성천으로 합류한다. 계곡물은 초간정 원림에 닿기 전 까지는 들판을 흐르는 평범한 시냇물이었다가 계곡이 시작되는 초간정 동쪽에서부터 바위를 때리며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여울이 있는 곳이다.그러다 여울이 끝나는 초간정 앞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요히 흐른다. 계곡이 소란하고 고요한 이유다. 아름다운 숲, 정자를 휘돌아 흐르는 계곡, 정자를 합쳐 초간정 원림이라고 한다. 명승 51호다.

초간정편액은 중국 시인 위응물의 시에서 따왔다

초간정은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1534~1591)가 1582년에 지었다. 본래 이름은 초간정사(草澗精舍)다.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1517~1586)이 편액글자를 썼다. 권문해는 퇴계 이황의 제자다.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이 그의 동문이다. 18세에 경상도 향시에서 장원을 한 뒤 1560년(명종15) 26살에 별시 문과에 급제했다. 형조 좌랑, 예조 정랑 등 관직을 거친 뒤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 등 주로 청직을 맡았다.

권문해는 48세(1581)에 뜻하지 않게 파직된다. 공주 목사로 재임 중 죄수가 탈옥했다. 그때 그는 고향 예천으로 돌아와 초간정사를 짓는다. ‘초간’은 당나라 시인 위응물(韋應物)의 ‘저주서간’의 “나 홀로 계류가에 자라는 우거진 풀을 사랑하노니 獨燐幽草澗邊生”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송나라의 주돈이가 뜰에 자라는 풀을 뽑지 않고 그대로 두고 보면서 천지 기운이 생동하는 모습을 관찰했다고 하는데 ‘초간’의 의미는 거기에 있다. 풀(草)에는 자연의 섭리가, 계곡의 물(澗)에는 우주의 원리가 숨어 있다.

▲ 초간정 앞에 있는 권문해 유적비

초간정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탔다가 1626년(인조 4)에 권문해의 아들인 죽소(竹所) 권별(權鼈)이 재건했는데 이 역시 화재로 타고 말았다. 100년이 넘도록 방치되던 이 정자를 1739년(영조 15)에 현손인 권봉의(權鳳儀)가 옛터에 중수했다. 전면 세 칸 측면 두 칸, 건물 중앙에 방 한 칸을 배치했다. 계곡 쪽으로 난간을 설치했다. 계곡의 바위 위에 막돌을 쌓아 기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세운 팔작지붕 건물이다.

뜻하지 않은 파직으로 고향 예천으로 돌아온 권문해는 몸이 많이 아팠다고 한다. 1582년 6월 9일 의원을 불러 침으로 피고름을 터뜨리고 굼벵이와 지렁이 즙을 죽에 타서 마셨다. 닷새 뒤 건강이 회복되자 곧바로 초간정을 찾았다고 당시 ‘초간일기’는 전한다. 그러나 그가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해 초간정을 찾은 지 일주일 만에 그의 부인 현풍곽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네 살 많은 부인과는 스무 살에 결혼해 30년을 살았다.

▲ 초간정은 권문해가 지은 정자로 불후의 명저 ‘대동운부군옥’ 이 완성된 곳이다.
▲ 초간정에서 본 계곡. 흘러서 내성천으로 합류한다.


“이제 그대 저승에서 추울까봐 어머니 손수 수의 지으시니 이 옷에는 피눈물이 젖어 있어 천추만세 입어도 해지지 아니하리. 오호라, 서럽고 슬프다. 사람이 죽고 살기는 우주에 밤낮이 있고, 사물에 시종이 있음과 다를 바 없으나, 이제 그대 상여에 실려 그림자도 없이 저승으로 떠나니, 나는 남아 어찌 살리오. 상여소리 한 가락에 구곡간장 미어져 길이 슬퍼할 말마저 잊고 말았네” - 초간일기-

부인의 제문이 실려 있는 ‘초간일기’는 3책이다. ‘선조일록 , 초간일기, 신묘일기’ 등이다. 3책은 ‘초간일기’라는 이름으로 묶여 보물로 지정됐다. 1580년부터 1591년까지의 일기로, 임란 전 사대부가의 일상생활과 중앙·지방의 관가 상황 등을 담고 있어 당시의 정치, 국방, 사회, 교육, 문화 등 전반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으나 부인의 제문에서 보듯 인간적인 면모 때문에 더욱 사랑 받는 책이다.

초간정은 권문해가 지을 당시에는 초간정사였다. 편액글씨는 소고 박승임이 썼다.

초간정은 역사에 남을 불후의 명저가 완성된 곳이다. 권문해는 1589년 초간정에서 한민족 최초의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 (大東韻府群玉)’을 완성했다. 중국의 음시부(陰時夫)가 지은 ‘운부군옥(韻府群玉)’의 체제를 빌려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했으니, 20권 20책이다. 권문해는 중국의 역사는 줄줄이 꿰고 있으면서도 한민족의 역사는 외면하는 조선 지식인들의 의식없음을 통탄하며 이 책을 썼다. “동국(東國)의 풍속이 질박해 문헌이 갖춰지지 못하니 선비라는 자들이 입으로 중국의 일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중국의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은 마치 어제 일처럼 밝은데 동국의 일은 상하 수천 년 일을 아득히 문자가 없던 시대의 일처럼 여긴다. 이는 눈앞의 물건을 보지 못하면서 천리 밖을 응시하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 초간선생 연보-


권문해는 벼슬생활 틈틈이 자료를 섭렵하며 저술을 시작했다. 삼국사기와 계원필경 등 한국 서적 174종과 사기와 한서 등 중국 서적 15종 등 190여종의 책을 참고했다.우리나라 역사와 지리, 문학, 철학, 예술, 풍속, 인물, 성씨, 산, 나무, 꽃, 동물 등이 망라돼 있다. 특히 놀라운 것은 2만여 항목에 이르는 성어(成語)의 전거를 빠짐없이 수록하고 있으며 인명만 해도 1,700여조목에 이를 정도로 방대하다. 또 인용한 우리나라 서적 가운데 40여종은 현재 전해지지 않은 책이다. ‘신라수이전’ 같은 책이 대표적이다.

▲ 글·사진 김동완 여행작가
이 책은 빛을 보지 못한 뻔 했으나 권문해의 치밀한 성품 탓에 세상에 알려졌다. 당초 3본을 베껴두었는데, 학봉(鶴峯) 김성일이 국가에서 간행하기 위해 한 질을 빌려가고 또 한강(寒岡) 정구가 한 질을 빌려갔다. 김성일은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잃어버렸고 정구는 집에 불이나 소실돼 버렸다. 아들 권별이 보관하고 있던 나머지 한 질이 1836년 8세손 권현상이 완료했다. 대동운부군옥 목판과 초고본(初稿本)은 보물로 지정돼 있다.

초간정은 이처럼 아름다운 경관에다 불후의 명작이 탄생한 곳이라는 명성 때문에 많은 후학이 찾아 시를 남기고 권문해의 업적을 칭송했다. 권문해 사후 100년이 채 못돼 청대 권상일이 초간정을 찾아 시를 남겼다.



시냇가 풀잎 푸르디 푸르러 세속에 물들지 않았네
옛 성현들 남긴 향기 다시 사람을 가르치네
속세 떠난 마음 천종의 녹봉을 사양하였고
작은 집 막 완성되어 길이길이 봄이로구나
성현의 춘추는 의리를 근본에 두었고
책상 머리에 경전은 밝은 정신 지어내누나
공손히 손 씻고 선조의 남긴 책을 펼치니
의기로운 마음은 정녕 시들지 않으리라

-권상일의 시 ‘초간정 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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