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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섭의 신삼국유사] 59. 당(唐)의 압력으로 문무왕과 부여융은 취리산에서 맹약하다

백제 부흥운동 견제·신라의 지배권 봉쇄

윤용섭 전 한국국학진흥원 부원장 등록일 2018년04월12일 21시45분  
공산성에서_바라본_취리산
의자왕이 당으로 끌려간 후의 일을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백제에는 원래 5부(部), 76군(郡), 200성(城), 36만 호(戶)가 있었는데, 이때 당나라는 이곳에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蓮)·덕안(德安) 등 다섯 도독부(都督府)를 두고 우두머리를 뽑아서 도독(都督)과 자사(刺史)를 삼아 다스리게 했다.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에게 명하여 사자성을 지키게 하고, 도 좌위낭장(左衛郎將) 왕문도(王文度)로 웅진도독을 삼아 백제에 남아있는 백성들을 무마하게 했다.

662년, 당은 소정방을 명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패강에서 고구려군을 깨뜨리고 마읍산을 빼앗아 진영을 세우고 평양성을 포위했으나, 마침 큰 눈이 내려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신라별기(新羅別記)’에 의하면, 문무왕 즉위 5년 을축(乙丑;665) 8월 경자(庚子)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웅진성에 가서 가왕(假王) 부여(扶餘) 융(隆)과 만나 단(壇)을 만들고 백마(白馬)를 잡아 맹세하되, 먼저 천신(天神)과 산천(山川)의 영(靈)에 제사를 지낸 뒤에 말의 피를 뿌리고 글을 지어 맹세했다.
제라회맹단

“저번에 백제의 선왕(先王)이 순종하는 것과 반역하는 이치에 어두워 이웃 나라와 평화를 두텁게 하지 않고 인친(姻親)과 화목하지 않으며, 고구려와 결탁해서 왜국(倭國)과 서로 통하여, 그들과 함께 잔포한 짓을 했다. 신라를 침략하여 성읍을 파괴하고 백성을 짓밟아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다. 천자(天子)는 한 물건이라도 제가 살 곳을 잃는 것을 민망히 여기고 백성들이 해독을 입는 것을 불쌍히 여겨, 자주 사신을 보내서 사이좋게 지내기를 타일렀었다. 그러나 백제는 지리의 험하고 먼 것을 믿고 천경을 업신여기니 황제가 크게 노하여 삼가 정벌을 행하니 깃발이 가리키는 곳에 한 번 싸움에 이 땅을 평정했다. 마땅히 궁실과 주택을 무너뜨려 못을 만들어서 자손들을 경계하고 그 폐단의 근원을 뽑아 없애어 후세에 교훈을 보이려 한다. 귀순해 오는 자는 회유하고 반역하는 자를 정벌하는 것은 선왕의 아름다운 법이요, 망한 나라를 흥하게 하고 끊어진 대(代)를 잇게 하는 것은 전철(前哲)의 공통된 법칙이다. 일은 반드시 옛것을 본받아야 하는 것은 사책(史冊)에 전해 오는 것이기 때문에, 전 백제왕(前百濟王) 사가정경(司稼正卿) 부여(扶餘) 융(隆)을 세워 웅진도독(熊津都督)을 삼아 그 선조(先祖)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상재(桑梓)를 보전케 하는 것이다. 신라에 의지하여 길이 우방(友邦)이 되어 각각 묵은 감정을 없애고 좋은 의(誼)를 맺어 친하게 지낼 것이며 삼가 조명(詔命)을 받들어 영원히 번국(藩國)이 될 것이로다. 이에 사자(使者)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노성현공(魯城縣公) 유인원(劉仁願)을 보내서 친히 권유하여 나의 뜻을 자세히 선포(宣布)하는 것이다.…삼가 윤언(綸言)을 받들어 감히 버리지 말 것이며, 이미 맹세를 정한 뒤에는 함께 변하지 말도록 힘쓸 것이다.…그러기 때문에 여기 금서철계(金書鐵契)를 만들어 종묘(宗廟)에 간직해 두는 것이니 자손 만대(萬代)가 되도록 감히 어기지 말 것이다. 신(神)은 이를 듣고 이에 흠향하고 복을 주시옵소서.”

맹세가 끝나자 폐백(幣帛)을 단 북쪽에 묻고 맹세한 글은 신라의 대묘(大廟)에 간직해 두었다. 이 맹세하는 글은 대방도독(帶方都督) 유인궤(劉仁軌)가 지은 것이다(위에 있는 ‘당사(唐史)’의 글을 상고해 보면, 소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융 들을 당나라 서울에 보냈다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부여왕 융을 만났다고 했으니, 당나라 황제가 융의 죄를 용서하고 돌려보내서 웅진도독을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때문에 맹서의 글에 분명히 말했으니 이것으로 증거가 된다).

이처럼, 당나라는 부여 융을 백제 땅으로 보내어 백제도독을 삼아 백제왕들의 제사를 받들고 유민(遺民)을 거느리게 함으로써, 한 편으로는 백제의 부흥운동을 견제하고 다른 편으로는 백제 땅에 대한 신라의 지배권을 봉쇄하려 한 것이다. 부여융은 웅진도독, 문무왕은 계림도독으로서, 모두 당나라 황제의 번신이니, 싸우지 말고 잘 지내라는 것이다. 과연 신라는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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