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덕왕 시대는 충담사가 안민가와 찬기파랑가를 짓는 등, 문화도 발달하고 정치도 잘 되었는데, 달이 차면 기울 듯 번영을 자랑하던 신라도 혜공왕 이후로부터 기울기 시작한다. 삼국유사에는 혜공왕의 탄생에 얽힌 기음과 같은 신비한 이야기가 있다. 경덕왕은 아들이 없어 왕비를 폐하여 사량부인(沙梁夫人)에 봉하고, 만월부인(滿月夫人)을 후비(後妃)로 봉하니, 시호가 경수태후(景垂太后)였다. 어느날 임금이 표훈대덕(表訓大德)에게,“내가 복이 없어서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바라건대 대덕은 상제(上帝)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해 주오.” 표훈은 명령
당(唐)나라에서 덕경(德經) 등을 보내 오자 대왕(大王)이 예를 갖추어 이를 받았다.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五岳)과 삼산(三山)의 산신들이 때때로 나타나서 대궐 뜰에서 임금을 모셨다. 3월 3일 왕이 귀정문(歸正門) 누각 위에 나가서 좌우 신하들에게 일렀다.“누가 길거리에서 위의(威儀) 있는 승려 한 분을 데려올 수 있겠느냐.” 이때 마침 위의 있고 깨끗한 고승(高僧) 한 사람이 길에서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었다. 좌우 신하들이 이 스님을 데리고 오니, 왕이 당신이 찾는 승려가 아니라면서 돌려보냈다. 다시 일개 승려가 있어
성덕왕(聖德王)제33대 성덕왕 신룡(神龍) 2년 병오(丙午; 706), 벼의 작황이 좋지 않아 백성들의 굶주림이 심했다. 그 이듬해인 정미년(丁未年) 정월 초하루부터 7월 30일까지 백성을 구제하는 곡식을 나누어 주는데, 하루 서 되(三升)로 했다. 일을 마치고 계산해 보니 도합 30만 500석이었다.왕이 태종대왕(太宗大王)을 위하여 봉덕사(奉德寺)를 세우고 7일간 인왕도량(仁王道場)을 열고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이때 비로소 시중(侍中)이라는 직책을 두었다(다른 책에는 효성왕 때의 일이라 한다).수로부인(水路夫人)성덕왕 때 순
제32대 효소왕대(孝昭王代)에 죽만랑(竹曼郞, 또는 죽지랑, 지관)의 무리 가운데 득오(得烏 혹은 得谷) 급간(級干)이 있어서 풍류황권(風流黃卷)에 이름을 올려놓고 날마다 나오다가, 10일이 넘도록 보이지 않았다. 죽만랑은 득오의 어머니를 불러 그대의 아들이 어디 있는가를 물으니 어머니가, “당전(幢典) 모량부(牟梁部)의 익선아간(益宣阿干)이 내 아들을 부산성(富山城) 창직(倉直)으로 보냈으므로 빨리 가느라고 미처 그대에게 인사도 하지 못했습니다.” 라 하였다. 죽만랑이 말한다. “그대의 아들이 만일 사사로운 일로 간 것이라면 찾아
제31대 신문대왕(神文大王)의 이름은 정명(政明), 성은 김씨(金氏)이다. 개요(開耀) 원년(元年) 신사(辛巳; 681) 7월 7일에 즉위했다. 아버지 문무대왕(文武大王)을 위하여 동해(東海) 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 이 기사에 관하여 일연선사는 절 안에 있는 기록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았다.“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처음 창건했는데 끝내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개요 2년(682)에 공사를 끝냈다. 금당(金堂) 뜰 아래 동쪽을 향해서 구멍을 하나 뚫었는데, 용이
어느 날 대왕이 그의 서제(庶弟)인 차득공(車得公)을 불러서 말하기를, “그대가 총재(곧 재상)가 되어 백관들을 고루 다스리고 사해를 태평하게 하라(均理百官 平章四海).” 하니 차득공은 말한다.“폐하께서 만일 소신을 재상으로 삼으시려 하신다면 신은 원컨대 국내를 잠행하여 요역(?役)의 괴롭고 편안한 것과 조부(租賦)의 가볍고 무거운 것과 관리의 깨끗하고 흐린 것을 알아보고 난 뒤에 그 직책을 맡을까 합니다.” 공(公)은 치의(緇衣)를 입고 비파(琵琶)를 손에 잡아, 거사(居士)의 모습으로 서울을 떠났다. 아슬라주(지금의 명주/溟州)
강수(强首)의 글이 당 고종을 감동시켜, 김인문이 억류가 풀려 돌아오다가 바다 위에서 죽었다. 문무대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만인 영륭(永隆) 2년 신미(辛未; 681)에 죽으니 유명(遺命)에 의해서 동해중(東海中)의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 대왕은 평시(平時)에 항상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말했다. “나는 죽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용(龍)이 되어 불법을 숭봉숭하고 나라를 수호하려 하오.” 이에 법사가 말했다. “용은 축생의 응보(應報)인데 어찌 용이 되신단 말입니까.” 왕이 말했다.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래오.
신미년(辛未; 671)에 당나라는 다시 조헌(趙憲)을 장수로 하여 5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으나, 또 전의 비법을 썼더니 배가 전과 같이 침몰되었다. 이때 한림랑(翰林郞) 박문준(朴文俊)은 김인문을 따라 옥중에 있었는데 고종(高宗)이 문준을 불러서 묻는다.“너희 나라에는 무슨 비법이 있기에 두 번이나 대병(大兵)을 내었는데도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느냐?”문준이 아뢰었다. “배신(陪臣)들은 상국(上國)에 온 지 10여 년이 되었으므로 본국의 일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멀리서 한 가지 일만을 들었을 뿐입니다. 저희 나라
총장(總章) 무진(戊辰; 668년)에 문무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仁問)·흠순(欽純) 등과 함께 평양에 이르러 당(唐)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은 고장왕(高藏王)을 잡아 당나라로 돌아갔다(보장왕인데, 왕의 성이 고씨이므로 高藏이라 했다. 고종기(高宗紀)를 상고해 보면, 현경(現慶) 5년 경신(庚申;660년)에 소정방 등이 백제를 정벌하고 그 뒤 12월에 대장군 계여하(契如何)로 패강도(浿江道) 행군대총관을, 또 소정방으로 요동도(遼東道) 대총관을 삼고, 유백영(劉伯英)으로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평정하고 돌아간 뒤에 신라 왕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백제의 남은 군사를 쫓아서 잡게 하고 한산성(漢山城)에 주둔하니 고구려·말갈(靺鞨)의 두 나라 군사가 와서 포위하여 서로 싸웠으나 끝이 나지 않아 5월 11일에 시작해 6월 22일에 이르니 우리 군사는 몹시 위태로웠다. 왕이 듣고 여러 신하와 의논하되 결론이 나지 않는데, 김유신이 달려와서 일이 급하여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고 오직 신술(神術)이라야 구원할 수가 있다면서, 성부산(星浮山)에 단(壇)을 쌓고 신술을 쓰니 갑자기 큰 독만한 광채가 단 위에서
삼국유사는 말한다. 또한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총장(總章) 원년(668년)에 당군(唐軍)이 평양 교외에 주둔 하면서 서신을 보내어 급히 군수물자를 보내달라고 했다.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묻기를, “적국에 들어가서 당병이 주둔하여 있는 곳으로 가기에는 지세가 험하여 극히 위험하다. 그러나 당나라 군사의 식량이 떨어졌는데도 군량을 보내지 않는다는 것은 역시 옳지 못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하였다.김유신이 아뢰었다. “신 등이 능히 군수물자를 수송하겠으니 청컨대 대왕께서는 심려치 마시옵소서.” 이에 유신과 인문 등은 군사
의자왕이 당으로 끌려간 후의 일을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백제에는 원래 5부(部), 76군(郡), 200성(城), 36만 호(戶)가 있었는데, 이때 당나라는 이곳에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蓮)·덕안(德安) 등 다섯 도독부(都督府)를 두고 우두머리를 뽑아서 도독(都督)과 자사(刺史)를 삼아 다스리게 했다.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에게 명하여 사자성을 지키게 하고, 도 좌위낭장(左衛郎將) 왕문도(王文度)로 웅진도독을 삼아 백제에 남아있는 백성들을 무마하게 했다.662년, 당은 소정방을 명하여 고구려를
나당연합군의 공격과 예식진의 배신에 의하여 백제는 멸망했다. 왜가 구원병을 보내고 복원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그런데 삼국유사에 나오지 않지만, 이 대목에서 백제의 해외진출에 관하여 잠깐 살피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의 연구조사 성과가 있기 때문이다. 흔히 근초고왕 시절 백제는 중국대륙에 진출하였다 한다. 교과서에는 백제가 전성기의 한 때, 요서지방에 진출하였다며 애매하게 적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서는 다르게 표현한다.중국의 송서(宋書),양서(梁書),남제서(南齊書),북제서(北齊書),남
신라군과 백제군이 합세하였을 때, 갑자기 새 한마리가 소정방의 진영 위에서 맴돌므로 사람을 시켜서 점을 치게 했더니, 반드시 원수(元帥)가 상할 것이라 하였다. 소정방이 두려워하여 군사를 물리고 싸움을 중지하려 하므로 김유신이 소정방에게 이르기를, “어찌 나는 새의 괴이한 일을 가지고 천시(天時)를 어긴단 말이오. 하늘에 응하고 민심에 순종해서 지극히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데 어찌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겠소!”하고 신검(神劍)을 뽑아 그 새를 겨누니 새는 몸뚱이가 찢어져 그들의 자리 앞에 떨어진다. 이에 소정방은 백강(지금의 금강)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義慈)는 곧 무왕(武王)의 맏아들로서 웅맹(雄猛)하고 담기(膽氣)가 있었고, 부모를 효성스럽게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당시 사람들은 그를 해동증자(海東曾子)라 했다. 증자는 공자의 후계자인데 대효자로 유명하다. 당나라 정관(貞觀) 15년 신축(辛丑;641)에 왕위에 오른 이후 주색(酒色)에 빠져 정사는 어지럽고 나라는 위태로웠다. 좌평(佐平) 성충(成忠)이 극간하였으나 듣지 않고 옥에 가두었다. 몸이 마르고 피곤해서 거의 죽게 되었으나, 성충은 글을 올렸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습니다. 원컨
제29대 태종대왕의 이름은 춘추이며 성은 김씨다. 각간으로 추봉된 문흥대왕 용수(또는 용춘)의 아들인데, 어머니는 진평대왕의 딸인 천명부인이다. 비는 문명황후 문희이니 곧 유신공의 막내누이다. 문희가 춘추공의 부인이 된 데는 유명한 꿈 이야기가 있다.처음 문희의 언니인 보희가 꿈에 서악에 올라가 오줌을 누는데 그 오줌이 서울에 가득 찼다. 다음날 그 꿈 얘기를 동생 문희에게 하니, 문희가 그 꿈을 비단치마를 주고 샀다. 10일이 지나 김유신이 춘추공과 함께 정월 상오 기일에 자기 집 앞에서 공을 찼다. 이 때 유신이 짐짓 춘추공의
경상북도와 군위군이 추진한 ‘삼국유사목판사업’이 지난 해 12월 29일자로 일단 마무리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초기에 간행한 ‘선초본(鮮初本) 삼국유사목판’과 조선중기에 간행한 ‘임신본(壬申本) 삼국유사목판’이 완료되었고 선초본을 저본(底本)으로 오?탈자(誤脫字)와 이체자(異體字)를 정정한 ‘경상북도 교감본’을 작성하여 한국국학진흥원 홈페이지-‘삼국유사목판사업’에 싣고 이를 공개하였다. 누구나 여기 들어가서 삼국유사 선초본과 임신본, 그리고 교감본을 활용할 수 있다.진흥왕 시절부터 국력을 키워온 신라가 진평왕과 선덕?진덕 두 여왕시대
어질고 슬기로웠던 선덕여왕이 승하하고 사촌동생인 제28대 진덕여왕이 즉위하였다. 진덕여왕은 신라의 마지막 성골(聖骨)이었으며 이름은 승만(勝曼)이다. 승만은 불교식 이름인데, 석가모니 당시 인도 사위국(舍衛國)의 공주로서 총명하고 자비심이 깊어 승만부인경의 주인공이 된 여인이다. 진덕여왕은 선덕여왕 시대의 비담의 난을 진압한 김유신과 김춘추에 의하여 옹립되었다. 여왕은 더욱 조여드는 백제의 공격과 고구려의 위세에서 벗어나고자 대당외교에 박차를 가하였으니, 친히 태평가를 짓고 비단을 짜서 그 가사를 수놓아 당나라 고종에게 바쳤다. 이
먼저 천사옥대(天賜玉帶) 이야기다. 고려 태조 연간(937년)에, 정승(正承) 김부(金傅)가 금으로 새기고 옥玉으로 장식한 허리띠 하나를 바쳤으니, 유명한 진평왕(眞平王)의 천사옥대다. 태조는 이를 내고(內庫)에 간직했다. 경순왕 김부가 고려 태조 왕건에게 진평왕 옥대를 바쳤다는 기록이다. 그럼 진평왕 옥대의 유래는 어떠한가?신라 제26대 백정왕(白淨王)의 시호는 진평대왕(眞平大王), 성은 김씨다. 대건(大建) 11년 기해(己亥; 579년) 8월에 즉위했다. 신장이 11척이나 되었다. 내제석궁에 거동하여 섬돌을 밟자 두 개가 한꺼번
이사부장군이 우산도를 평정한 이야기 다음, 제24대 진흥왕과 25대 진지왕 시대의 삼국유사의 이야기는 계속된다.진흥왕은 왕위에 올랐을 때 나이가 15세였으므로 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태후는 법흥왕의 딸로서 입종 갈문왕의 비였다. 진흥왕은 임종할 때에 머리를 깎고 법의를 입고 운명했다.승성(承聖) 3년(553년) 9월에 백제의 조사가 진성을 침범하여 남녀 3만9천명과 말 3천필을 빼앗아 갔다. 이보다 먼저 백제가 신라와 군사를 합하여 고구려를 치자고 하니 진흥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흥하고 망함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만약 하늘이 고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