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특히 월성해자에 대한 정밀발굴조사 결과 월성 해자는 물을 담아 성 안팎을 구분하면서 방어나 조경의 기능을 했으며, 다양한 의례가 이뤄진 특별한 공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월성 해자는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땅을 파서 도랑을 만든 수혈해자에서는 삼국통일 이전 시기(4~7세기) 유물이, 그리고 돌을 쌓아서 만든 석축해자에서는 삼국통일 이후 시기(7~9세기)의 유물들이 발견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15년부터 현재까지 1~3호 해자에 대한 정밀보완조사(3차)를 실시한 결과 1호 수혈해자 내부 전체조사를 통해 목조 호안 구조물에서 석축해자로 축소개축의 변천을 확인했으며, 세부 축조과정 및 호안 구조물의 복원과 다종다양한 유물을 확보했다.
정밀발굴조사에서는 △의례에 사용된 가장 이른 시기(最古)의 축소 모형(미니어처) 목재 배 1점 △4~5세기에 제작된 가장 온전한 형태의 실물 방패(防牌) 2점 △소규모 부대 지휘관 또는 군(郡)을 다스리는 지방관인 당주(幢主)와 곡물이 언급된 문서 목간 1점 △총 63종의 신라의 씨앗과 열매△어린 멧돼지뼈 26개체와 곰뼈 15점 △단조철부(소도끼) 36점 등을 발굴했다.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수혈해자의 최대폭은 약 58cm, 최대깊이는 약 1.8m이고, 석축해자의 최대 길이는 약 150m, 최대폭은 약 50m, 최대높이는 약 0.8m로 확인됐다.
석축해자는 총 6개의 독립된 형태가 확인되며 각 해자는 입·출수구로 연결돼 있다.
월성해자는 통일 직후 7세기 후반에 월성 주변에 대대적인 정비 공사가 이뤄졌는데, 아마도 이 시기 즈음에 수혈해자에서 석축해자로 변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동문지 해자는 1980년대 이후 복원 공사가 완료됐다.
이후 1984년에서 1985년에 걸쳐 해자주변 전체에 대한 시굴조사가 이뤄졌고, 그 시굴조사를 토대로 월성의 북편에 해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 이에 대한 조사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게 됐다.
그 후 2015년에서 2018년까지 약 4년간에 걸쳐서 이뤄진 발굴조사는 지금현재 정비가 돼 있는 4호, 5호에 대한 발굴조사와 그리고 정비과정까지 이어지는 조사로 진행됐다.
그리고 현재는 1호, 2호, 3호에 대한 정비를 위한 보완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해자는 내부 퇴적토를 통해서 약 5세기 정도에서부터 9세기까지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지속적으로 사용되면서 퇴적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전체적으로 아래쪽에서 빠른 시기 토기가 나오고 위쪽으로 갈수록 늦은 시기 토기가 나온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해자 자체가 5세기에서 9세기까지 약 500년 정도의 긴 시간 동안 사용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확보했다.
또한 이번 조사에서는 판벽 목조와 판벽 나무기둥을 박고, 판자벽을 세우는 것들이 1호 해자 전구간에 걸쳐서 확인돼, 당시 사용시기의 해자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료들을 확보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신라인들이 가시연꽃이 가득 핀 해자를 보며 걷고, 느티나무숲에서 휴식을 취했을 5세기 무렵 신라 왕궁의 풍경을 복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