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 월성 1호 해자 전경
경주 월성(사적 제16호) 해자는 신라 멸망 때까지 약 500년 동안 지속적으로 사용되면서 진흙 속에 다양한 유물을 남겼다.

특히 월성해자에 대한 정밀발굴조사 결과 월성 해자는 물을 담아 성 안팎을 구분하면서 방어나 조경의 기능을 했으며, 다양한 의례가 이뤄진 특별한 공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월성 해자는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땅을 파서 도랑을 만든 수혈해자에서는 삼국통일 이전 시기(4~7세기) 유물이, 그리고 돌을 쌓아서 만든 석축해자에서는 삼국통일 이후 시기(7~9세기)의 유물들이 발견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15년부터 현재까지 1~3호 해자에 대한 정밀보완조사(3차)를 실시한 결과 1호 수혈해자 내부 전체조사를 통해 목조 호안 구조물에서 석축해자로 축소개축의 변천을 확인했으며, 세부 축조과정 및 호안 구조물의 복원과 다종다양한 유물을 확보했다.

정밀발굴조사에서는 △의례에 사용된 가장 이른 시기(最古)의 축소 모형(미니어처) 목재 배 1점 △4~5세기에 제작된 가장 온전한 형태의 실물 방패(防牌) 2점 △소규모 부대 지휘관 또는 군(郡)을 다스리는 지방관인 당주(幢主)와 곡물이 언급된 문서 목간 1점 △총 63종의 신라의 씨앗과 열매△어린 멧돼지뼈 26개체와 곰뼈 15점 △단조철부(소도끼) 36점 등을 발굴했다.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수혈해자의 최대폭은 약 58cm, 최대깊이는 약 1.8m이고, 석축해자의 최대 길이는 약 150m, 최대폭은 약 50m, 최대높이는 약 0.8m로 확인됐다.

석축해자는 총 6개의 독립된 형태가 확인되며 각 해자는 입·출수구로 연결돼 있다.

월성해자는 통일 직후 7세기 후반에 월성 주변에 대대적인 정비 공사가 이뤄졌는데, 아마도 이 시기 즈음에 수혈해자에서 석축해자로 변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월성 해자 발굴조사 결과 출토된 씨앗 및 화분과 규조 분석을 통해 추정한 월성해자 및 주변 복원도.
월성 해자에 대한 발굴조사는 1979년 동궁과월지에서 올라오는 길 왼쪽 나지구 석축해자 발굴을 시작으로 2014년까지 조금씩 조사가 진행됐다.

이 동문지 해자는 1980년대 이후 복원 공사가 완료됐다.

이후 1984년에서 1985년에 걸쳐 해자주변 전체에 대한 시굴조사가 이뤄졌고, 그 시굴조사를 토대로 월성의 북편에 해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 이에 대한 조사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게 됐다.

그 후 2015년에서 2018년까지 약 4년간에 걸쳐서 이뤄진 발굴조사는 지금현재 정비가 돼 있는 4호, 5호에 대한 발굴조사와 그리고 정비과정까지 이어지는 조사로 진행됐다.

그리고 현재는 1호, 2호, 3호에 대한 정비를 위한 보완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해자는 내부 퇴적토를 통해서 약 5세기 정도에서부터 9세기까지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지속적으로 사용되면서 퇴적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전체적으로 아래쪽에서 빠른 시기 토기가 나오고 위쪽으로 갈수록 늦은 시기 토기가 나온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해자 자체가 5세기에서 9세기까지 약 500년 정도의 긴 시간 동안 사용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확보했다.

월성 해자 호안목제구조물 모습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일 월성발굴 현장에서 해자에 대한 정밀발굴조사 성과 설명회를 가졌다.
특히 구덩이를 파는 수혈해자에서 석축해자로의 이행과정을 확인했기 때문에 이전 조사에서 보다 진일보된 조사 성과를 낳았다.

또한 이번 조사에서는 판벽 목조와 판벽 나무기둥을 박고, 판자벽을 세우는 것들이 1호 해자 전구간에 걸쳐서 확인돼, 당시 사용시기의 해자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료들을 확보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신라인들이 가시연꽃이 가득 핀 해자를 보며 걷고, 느티나무숲에서 휴식을 취했을 5세기 무렵 신라 왕궁의 풍경을 복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황기환 기자
황기환 기자 hgeeh@kyongbuk.com

동남부권 본부장, 경주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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