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 3d gpu
바로가기
메뉴로 이동
본문으로 이동

신도청시대, 낙동강을 가다-(5) 낙동강 제3발원지, 영주 죽계천

소백산이 빚은 아홉 폭의 산수화 굽이굽이 절개가 흐른다

김정모 서울취재본부장,권진한 기자 . 등록일 2015년04월02일 21시50분  
▲ 소백산 아홉 구비를 돌아 절경을 이루는 죽계구곡은 고려 충숙왕 때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안축이 지은'죽계별곡'의 배경이 된 곳이고, 퇴계 이황도 그 비경에 취해 찬사를 보냈다.

 낙동강 제3발원지 중의 하나인 소백산 죽계천. 내성천 상류로 예천 용궁에 이르러 낙동강 본류와 합류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낙동강의 근원은 태백산 황지, 문경 초점, 순흥 소백산이며, 그 물이 합하여 상주에 이르러 낙동강이 된다"고 돼있다.
  죽계천은 문장가 안축이 지은 고려가요 '죽계별곡(竹溪九曲)'의 배경지로 유명하다. 죽계별곡은 안축이 고려 말 1340년 경상도 상주목사가 되어 고향 순흥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노래다.  영조 때 순흥부사였던 신필하와 퇴계 이황도 소백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을 따라 오르내리면서 빼어난 경관 아홉 곳 마다 이름을 지어 붙였다. 아름다운 죽계 굽이굽이를 시를 통해서 노래했던 것이다. 퇴계가 1549년 '유소백산록'을 쓴 길이다. 수량이 지금보다 풍부했던 당시 죽계천을 따라 소백산이 빚은 아홉 폭의 산수화였을 것이다. 죽계구곡은 소백산 국망봉 동쪽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초암골을 지나면서 순흥 배점리 금당반석에 이르는 구간. 신축한 초암사는 의상대사가 초막 암자를 짓고 살았던 터라고 전해지는 비좁은 터에 지은 절이다.
 초암골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죽계 물은 크고 작은 암석을 감아 돌며 굽이쳐 흘러내린다. 그리고 산굽이마다 낮은 언덕 작은 낭떠러지를 흘러 용소(龍沼)로 떨어지면서 피어오르는 물보라가 장관이었으리라.

  죽계구곡은 근래 들어 초암사를 중창하면서 시멘트 도로를 깔아놓아 풍광이 흐트러져 아쉽다. 1980년 전후 죽계천을 처음 본 황보윤식 씨가 2004년에 다시 보고나서 비교해가며 평했다 "겨울이 되면 두껍게 얼어붙은 하얀 얼음 위를 다시 얕게 덮고 흘러내리는 물이 또 얼어붙어서 층층이 쌓여진 얼음절벽은 동화 속의 얼음동산을 만들어 내곤 하였다. 물속에는 손바닥만한 버들치들이 떼를 지어 이리저리 헤엄쳐 놀고 돌을 들추면 주먹만한 가재들이 그득하였다. 밤길을 걷게 되노라면 반딧불이가 지천으로 나는 탓에 이것이 도깨비불처럼 느껴져 걷기조차 무서울 지경이었다. 죽계구곡이 초라하게 된 데에는 초암사 중건이 주범노릇을 했다. 죽계구곡의 주변은 계단식 논들이 사과밭으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사과밭에 뿌려진 제초제 등 잔류농약과 비료성분이 계곡으로 흘러내려서 계곡의 유일한 어종인 버들치는 물론, 가재도 죽고 다슬기도 없어지게 되었다. 반딧불이 유충도 자리지 못하여 이곳 심산유곡은 개똥벌레가 없는 계곡이 되고 말았다."
 
  죽계천을 따라 내려 오면 수령 600년이 된 느티나무가 있는 배점마을의 삼괴정을 만난다. '배점'은 배순의 무쇠점(대장간)이 있던 마을이라는 유래다. 배점 앞 제법 큰 못인 순흥지를 지나면 토질이 좋고 비옥한 순흥들이 활짝 열린다. 죽계천은 조선 성리학 시대를 연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紹修書院)을 낳았다. 풍기군수 주세붕이 주자학(성리학)을 고려에 도입하는 등 유학을 진흥한 회헌 안향(安珦)을 배향하는 사묘(祠廟)를 설립한데 이어 1543년에 유생교육을 겸비하기 위해 설립한 백운동서원의 후신이다. 서원을 안고 도는 곳에 노송들과 수령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풍진의 역사를 말하듯 그 옛날 선비의 기품을 빼닮았다. 이을 소(紹), 닦을 수(修)로 소수(紹修)란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서 닦는다'는 뜻이 들어있다고 하니 당시 학풍도 무척 어지러웠던 것 같다. 그 때나 지금이나 늘 법고창신을 숭상하는 모양이다.
 1546년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했다. 이 서원은 순흥안씨 인물을 위해서 세워졌고 순흥안씨에 의해 자리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풍기군수 시절 이황이 붕괴된 교학(敎學)을 진흥하고 사풍(士風)을 바로잡기 위해 서원 지원을 조정에 요청한 뒤 1550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사액(賜額)현판, 사서오경, 성리대전 등의 서적을 하사받았다. 
 

▲ 소백산 비로봉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죽계천가에 자리한 소수서원 전경.

소수서원 앞을 흐르는 죽계천변에는 시원한 물빛에 취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의 취한대(翠寒臺)와 바위에 새겨진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백운동(白雲洞)이라는 글씨는 퇴계 이황 선생이 새겼다고 한다. '경(敬)'은 경천애인(敬天愛人)이다. 주세붕 군수가 백운동서원을 지을 당시 정축지변에 희생 당한 순흥도호부민들의 억울한 원혼이 밤마다 울부짖자 이를 달래기 위해 붉은 글씨로 '경(敬)'을 새겼다는 슬픈 사연이 전해온다.

 순흥과 죽계천도 시대를 따라 새로운 변화의 몸짓을 보이고 있다. 과일을 많이 먹는 식생활에 따라 소득원으로 발굴한 것이 사과다. 순흥을 비롯한 영주사과는 전국 생산량의 14%를 차지하는 특산물. 등산객의 폭증에 따라 영주시는 등산코스를 개발해 주말경기를 만끽하고 있다. 소수서원에서부터 죽계구곡을 지나 초암골과 달밭골을 거쳐 비로사까지 이르는 약13㎞ 4시간 남짓 걸리는 등산길이다. 초암골에서 달밭골까지 계곡에 졸졸 흐르는 청아한 물소리를 들으면 걷는 숲길이 제법 운치 있다.
 소수서원도 곧 제2의 중흥기를 맞을 것 같다. 소수서원을 비롯한 한국의 대표적인 서원 9개를 한국의 서원 세계유산등재추진단이 지난 1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신청을 완료한 상태다. 올 9월 유네스코 본 실사를 앞두고 있다. 수(修)와 경(敬)의 소수서원의 정신이 세계로 미래로 확장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소수서원 창건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조선시대의 유학정신이 현재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인근에 무분별한 개발은 소수서원의 이미지를 훼손할 우려가 있으므로 신중했으면 좋겠다.
 
  순흥은 정통성이 없는 세조를 제거하기 위한 거사가 진했 됐던 혁명 전야의 고을이다. 단종을 지키려다 순흥에 유배됐던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 때문에 고을의 운명이 바뀐다. 순흥부의 주민들은 금성대군이 사사된 곳에서 그의 혈흔이 묻은 돌을 발견하고 주변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 서원 옆에 만든 금성단이 그것이다.
 1453년 수양대군은 한명회 신숙주와 결탁 김종서를 살해하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왕위를 찬탈, 금성대군을 순흥으로 유배 보냈다. 금성대군은 비밀리에 단종을 왕위로 복귀시키려는 음모를 꾸민다. 순흥부사 이보흠을 비롯해 많은 경상도 상도(上道)의 선비들이 가세했다. 거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노비의 밀고로 금성대군은 물론 동행했던 많은 선비들도 목숨을 잃었다. 1457년 정축년 10월. 정축지변이다. 선비들의 피는 죽계천을 적시고 10여리 떨어진 동촌마을까지 붉은 핏물이 이어졌다. 그래서 동촌은 지금까지도 '피끝'으로 불린다고 전해진다. 순흥도호부는 폐부되고 2군 1현으로 분리된다. 세조 이전까지는 순흥이 요즘말로하면 꽤 큰 도시였는데 급격히 쇠락한 배경이다. 이 지방에는 금성대군은 소백산의 산신으로, 단종은 태백산의 산신이 됐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죽계천은 단산면 사천리에서 부석사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를 받아 보태고, 영주시 창진동에서 풍기에서 내려오는 물과 합수하여 서천이 되어 영주시내로 흐른다. 서천은 물야에서 발원하여 봉화읍을 적시며 영주 이산면을 거쳐 내려오는 물줄기와 문수면에서 합수하여 내성천을 이루어 예천으로 흐른다. 
 

▲ 영주시를 관통하는 서천변 전경.

서천변 언덕에는 세 명의 판서가 연이어 살았다는 삼판서 고택이 우뚝하게 자리잡고 있다. 영주는 여말 선초에 이 나라를 쥐락 펴락하던 인물을 낳은 고장이다. 안향 안축 안보, 즉 삼안(三安)의 성리학 개조가 그렇고, 삼봉 정도전(鄭道傳, 1342?~ 1398)은 고려와 조선의 운명을 가르며 근대의 서막을 연 불세출의 위대한 정치가다. 삼봉은 정몽주 남은 등과 함께 고려조정을 개혁하려다 1392년 이성계를 왕좌에 올리는 역성혁명에 성공했다. 조선초 비밀리에 만주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세워 명(明) 태조 주원장과 갈등하던 중, 이방원의 군졸에게 피살되었다. 그는 영주에서 출생하여 한양 삼각산에서 성장하였고 아버지 정운경이 조정에 출사하며 수도인 개경으로 이주했다. 그 뒤에도 여묘살이 유배 생활 등 때때로 고향을 찾아 재기를 도모했다.
 삼봉이 꿈꾼 '재상정치'는 조선말 풍고 김조순이,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전제개혁은 대한민국 조봉암 초대 농림장관이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친원(親元)파 이인임 정권 때 친명(親明)외교를 주장하다 실각하여 10년 세월 유랑한 '신외교'의 지략은 노태우의 북방외교, 박근혜의 중국동반자 외교의 모델이라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모두 삼봉의 뜻에 부합했는지 알 길이 없다. 재벌개혁이 현대판 수정자본주의라는 목소리가 다시 나오고 있고 내각책임제가 세계적으로 유행하니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 아니겠는가.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왕위에 앉힐때 내건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내세운다는 '폐가입진(廢假立眞)'은 오늘날의 시대정신으로도 유효하다.
 그래서 삼봉의 꿈은 그가 비운에 간지 600여년의 세월을 두고도 서천에 아직 깃들어있는 듯하다. 고려와 조선조 영주 땅에서 자라난 인물과 일어난 일들을 살펴보면 선비의 원고을 영주를 낳고 보며 만고의 세월을 흐르는 죽계천, 서천이 다시금 새롭게 보인다.

<ⓒ 경북일보 & kyongbuk.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