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화에 밀려 경주 도심 상징에서 평범한 쉼터로 전락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지구촌의 모든 정보와 세상사 모든 일을 한번 검색으로 속시원히 펼쳐 보여주는 '네이버' 가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검색창에 '팔우정'을 입력하니 나오라는 정자는 나타나지 않고 '팔우정해장국', '팔우정 숯불갈비", '팔우정 식당' 같은 정자 이름에 기대어 먹고 사는 업소 이름이 뜰 뿐이다. 지도도 블로그도 지식인도 팔우정에 대한 설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예상치 못한 일이라 당황했다. 인터넷 상에서 팔우정은 '해장국'이나 '삼거리' 앞에 놓여 그들을 수식하거나 그들과 몸을 섞어 상호에 대한 지리적 표시를 부역하는, 장식 노릇을 하고 있었다.

▲ 팔우정 공원 안에 있는 팔우정 유허비와 팔우정비.정자는 대한민국 농촌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모정을 그대로 본따 지어 꼴불견을 연출하고 있다.
팔우정은 경주 최씨 8형제의 우애를 기리기 위해 그들의 세거지인 황오동에 1614년(광해 6년)에 세운 정자다.

경주역에서 불국사 쪽으로 가다가 구 경주시청으로 꺾어지는 삼거리의 오른쪽 팔우정 공원에 있다. 정자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대한민국 농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대량 생산되는 모정, 표준형 쉼터와 전혀 다르지 않다. 2009년 팔우정 공원을 조성하면서 8각형 정자에 기와를 얹어 그저 햇볕이나 피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럴 바에야 왜 아까운 부지를 사들여 공원을 만들었는지 담당자를 만나 묻고 싶어졌다.

팔우정 이야기는 육의당 최계종에서부터 시작된다. 계종은 경주 최씨 사성공파 파조인 예의 6대 손이다. 예는 태조 2년에 치러진 조선 최초의 과거에서 문과 급제해 종3품 성균관 사성을 지냈는데 그 벼슬을 따 사성공파의 파조가 됐다.

계종의 아버지는 신보인데 4명의 아들을 두었다. 셋째가 정무공 최진립 장군이고 막내가 계종이다. 태어난지 8일 만에 어머니 황씨가 타계하자 종당숙 최경천의 후사로 들어갔다. 그의 이름 계종은 종가를 잇는다는 뜻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형 진립과 함께 전투에 나서 공을 세웠다. 진립은 공조참판을, 계종은 남포현감을 지냈다. 진립은 병자호란때 순절했고 계종은 광해군때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경주최부잣집 12대 만석의 초대는 진립이고 2대는 진립의 셋째 아들 동량인데 동량은 교촌 최씨의 파조이다. 계종도 양부로부터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았다. 기왓집 50칸과 노비 100명, 논 272두락, 밭 263두락이다.

그때 물려 받은 땅과 집이 황오동과 팔우정 일대였다. 팔우정이 현재의 자리에 들어서게 된 데는 상속의 비밀이 숨어있다.

계종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이 동로다. 동로는 국준 국필 등 여덟 아들을 두었다. 계종은 손자가 한명씩 태어날 때마다 저택안에 단을 세우고 회화나무를 한 그루씩 심었다. 그렇게 하면 자손이 번성하리라 믿었던 것이다.

다른 설로는 계종의 며느리 경주 이씨가 아들을 낳을 때 마다 뒤뜰에 나무를 한 그루씩 심었는데 회화나무라고도 하고 느릅나무라고도 한다. 국준 국필 등 여덟 손자는 계종의 소망대로 크게 번성해 육의당계 여덟종파로 나뉘었다.

1614년 8형제의 아름다운 우애를 기리기 위해 정자를 지었다. 처음에는 중국 한나라 고양리에 사는 순숙 8형제의 사례에 따라 '고양정(高陽亭)'이라 이름했다.

순숙 8형제가 모두 재능과 효성이 뛰어나 칭송이 자자했는데 사람들은 그 형제를 보고 여덟 용이라고 불렀다 한다. 온집안이 화목해 그들이 사는 마을이름을 고양으로 바꿔 불렀다.

1751년에 후손 사진이 중수했고 1811년 '팔우정' 비석을 세웠다. 지금 팔우정 공원에 서 있는 비석은 이 때 만들어졌다. 비석을 건립한 기념으로 향음주례가 열렸다. 시를 짓고 학문을 강론하는 명소가 됐다.

1899년에 팔우정의 축대가 무너졌다. 후손 연수가 주축이 돼 인근마을 백성들이 동원해 정자를 개수했으나 그 후 정자는 무너지고 비석만 남았다.

□현대화의 물결에 밀려난 팔우정

▲ 팔우정 로타리가 있던 자리에 신호대가 들어섰다. 로터리 시절, 로타리 한복판에 축대를 쌓고 팔우정비석을 세웠다.
팔우정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현대사 만큼이라 파란만장하다.

1936년 '대구-불국사'간 협궤열차가 광궤선으로 바뀌면서 서라벌 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경주역이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경주역에서 50여m 떨어져 있던 팔우정은 도심의 핵으로 떠올랐다. 1960년 경주역에서 불국사로 가는 신작로를 확장공사하면서 팔우정비석이 있던 자리에 도로가 나게 되자 경주 최씨 문중이 들고 일어났다. 마침 이승만 대통령이 경주에 내려왔다.

하와이에서 이승만을 도와 독립운동을 했던 최금곡이 팔우정의 실정을 대통령에게 설명했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비석이 있던 자리에 로터리가 들어서게 되고, 비석은 로터리 가운데 축대를 쌓아 그 위에 세워졌다.

로터리가 들어선 후 팔우정은 경주도심의 아이콘이었다. 팔우정 앞에는 해장국거리가 들어서 30여개의 식당이 문전성시를 이뤘고 동쪽으로 불과 200여m 떨어진 곳에 경주시청이 들어섰다.

경주역과 팔우정 사이에 시외버스터미널이 들어서고 건너편에는 청과물 도매시장이 형성됐다. 도매시장 바로 아래에는 염매시장이 자리잡아 팔우정 부근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 1811년 건립된 팔우정비. 팔우정 공원안에 있는 진짜유물이다.
그러나 1993년 로터리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신호대가 들어서면서 비석은 동남쪽 고분쪽으로 옮겨졌다가 2009년 신호대 서쪽에 팔우정 공원이 조성되면서 그쪽으로 옮겨졌다. 팔우정 공원에는 비석 외에도 유허비를 세웠는데 유허비에 팔우정과 관련한 이야기를 새겨뒀다.

경주의 도심이 북천 넘어 도시북쪽으로 옮겨가면서 팔우정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지워졌다. 황남동 황오동 지역의 민가들이 신라왕경복원사업에 따라 철거되고 경주시청도 옮겨간 지 오래다.

구도심도 쪼그라들었고 문전성시를 이루던 팔우정해장국거리도 한산하기만 하다. 사람들의 관심이 사라지면서 팔우정이 해장국이나 식당 이름인 줄 알고 있다.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팔우정 해장국거리

▲ 팔우정해장국 거리. 쪽샘지구 정비사업에 따라 20여곳의 식당이 폐업하고 5곳 정도만 남아 장사를 하고 있다.
경주 해장국은 닭뼈 고운 육수에 신김치와 묵, 콩나물을 넣고 끓인 뒤 해초인 모자반을 고명으로 올리면 시원한 맛이 그만이다.

전국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경주 음식이다. 팔우정 앞에 늘어서 집단을 이루는 바람에 '팔우정 해장국'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1970년 경주관광단지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밀려드는 손님들로 즐거운 비명을 울렸다.

특히 90년대 들어 심야영업이 금지되던 시절 관광특구로 지정받은 해장국 골목은 24시간 영업이 가능해 인근 포항과 울산 등지의 술꾼들이 몰려들면서 경주의 명물거리로 부상했다. 한 때 30여곳이 문을 열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트랜드도 바뀌었다. 팔우정 해장국은 흘러간 음식이 됐다. 곳곳에 산해진미가 널려있다. 사람들의 관심은 멀어져갔다.

마침 문화재청과 경주시가 2001년부터 쪽샘지구 정비사업을 벌이면서 팔우정 해장국거리를 매입해 공원으로 조성키로 했다. 보상금을 주고 폐업을 유도하는 것이다.

벌써 20여곳이 문을 닫고 5군데 정도가 문을 열고 있으나 이들 업주들도 고령이어서 팔우정 해장국의 앞날은 어둡기만 하다.

▲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문제는 당국이 폐업을 유도하면서 경주 고유의 음식인 해장국에 대한 보존대책이 마땅치 않다는데 있다고 본다.

도시의 매력은 문화유산, 대학, 즐길거리와 먹거리에 있다고 한다. 가뜩이나 관광상품부재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경주가 명실상부한 국제관광도시의 면모를 갖추려면 있는 자원부터 잘 챙기고 발전시켜야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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