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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섭의 신삼국유사] 37. 고구려와 백제의 기원

윤용섭삼국유사사업본부장 등록일 2017년04월06일 18시00분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비의 비문은 다음과 같이 시조의 건국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옛날에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께서 나라의 기틀을 창건하셨는데 북부여에서 나왔다.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이었다. 알을 깨고 나왔는데 나면서부터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出 生而有聖德/유석시조추모왕지창기야 출자북부여천제지자 모하백여랑 부란강출 생이유성덕). 광개토대왕(정식 명칭은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 비문은 『삼국사기(1145년 출판)』보다 731년 앞선 기록이고 260여자의 결자가 있으나 대부분의 원형이 보존되어 있으며 중국측의 기록이 아닌, 고구려 자체의 역사기록이므로 그 가치가 높다. 현재 길림성 집안시(集安市)에 있는데, 중국정부에서 관람을 통제하고 있다. 호태왕비는 주몽을 ‘추모’, 천제의 아들이라하고 동명왕이란 말은 없다.

동명성왕이 천제와 하백의 딸이 생산한 알에서 나왔다는 점은 공통되나 알을 버린 사람에 대하여는 기록이 조금씩 다르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는 금와왕이 버린 알이 자라 주몽이 되었으나, ‘논형’, ‘주림전’이나 ‘위략’에는 고리국왕, 영품리왕 또는 탁리국의 임금이 버린 아이가 자라 부여를 세워 동명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여기에서 원래 부여를 세운 분이 고리국 등에서 탈출한 동명왕이며, 고구려를 세운 분은 추모 또는 주몽이지 동명왕이 아니라는 학설도 성립가능하다. 즉, 부여의 건국설화를 고구려가 빌렸다는 것이다.

한편 북한의 손영종은 고구려의 건국연대가 기원전 37년이라는 통설을 부인하고 기원전 277년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로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사론(史論)에 고구려는 진(秦:BC 9세기∼BC 206년), 한(漢)이후부터 중국의 동북쪽 모서리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광개토왕비에는 광개토왕이 시조 추모왕의 17대손(삼국사기에는 12대손)으로 기술되어 있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의 첫 「갑신년」이 기원전 277년이라는 논거다. 그리고 고구려 2대에서 6대까지 유류왕,여률왕,대주류왕, 애루왕을 추가한다. 우리가 아는 황조가를 부른 유리왕은 7대 유리명왕이 된다는 주장이다.

광개토대왕 비문 탁본
그리고 해모수가 부여를 세우고 그 둘째 아들 고진이 고구려를 세웠는데 그 손자인 불리지가 유화부인과 만나 주몽을 낳았다. 모자(母子)가 동부여에 가서 일하다가 탈출하여 졸본부여에 왔다가 그 임금의 눈에 들어 그의 딸인 소서노와 혼인한 후 세력을 키워 고구려를 재건하였다는 등, 부여와 고구려의 창건역사는 신화와 설화에 쌓여있거니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연대가 올라가고 그 규모가 클지도 모른다. 앞으로 남북통일이 되어 만주지역에 대한 연구가 보다 자유로워지든지 중국과의 학술교유가 활발하든지 하면 더욱 정제된 내용이 나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한편 백제는 주몽이 동부여에 두고 온 아들인 유리가 찾아오자 소서노가 두 아들(비류와 온조)을 데리고 남하하여 건국한 것으로 되어있다. 비류는 바닷가 미추홀에 나라를 세웠으나 얼마 못가서 실패하고 온조왕이 세운 백제는 발전을 거듭하여 후일에 번성하였다.

일연은 고구려조에 이어 변한 백제에 대하여 간략히 설명한다. 그는 최치원의 설을 따라 백제를 변한으로 보는 것 같다. 그러면서 온조의 계통이 동명에서 나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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