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덤덤한 벽에 얼굴을 달아줍니다조금씩 일그러진 표정, 떠나간 얼굴들 모두세 가닥의 전선 두 개의 나사에 묶이죠면벽은 구도적이에요 무표정하려는 경향입니다평면의 사원에 플롯을 재구성합니다 단다와 달다그리고 달 것이다, 는 시점의 문제콘센트마다 한 사람이 자기를 꽂고 충전되기를 바라는 것은 종교가 될 수 있을까요밤새 시효 지난 꿈을 고정하는두 개 무표정한 나사를 알고 있어요낯익은 설비공이 변기를 놓고 물소리를 흘려봅니다버릴 것들이 많은 수도승처럼모두를 대표해 울어주는 수도꼭지처럼나는 멀었습니다 면벽 뒤에 신발을 고쳐 신고플러그에 딸린
못은 망치에얻어맞는다.고통을이겨 내며벽에 조금씩 박힌다.그때 비로소못은힘을 갖는다.무거운 액자와시계를거뜬히 든다.[감상] 를 읽다가 예전에 딸아이와 함께 읽은 이라는 인문학 동화가 떠올랐다.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내게 상처를 준 말과 나쁜 기억은 빨리 잊어라”, “내 운명을 긍정하고 다시 한번 도전하라”와 같은 니체의 철학을 생활 동화로 풀어쓴 책이다. 못이 힘을 갖는 것은 망치 덕분이다. 벽에 깊이 박힌 것은 고통을 이겨 냈기 때문이다. “나를 죽이지 못할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어디 한두 번이랴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오늘 일을 잠시라도낮은 곳에 묻어 두어야 한다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사랑하는 이여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추운 겨울 다 지내고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감상] 지난 설 연휴 마지막 날에는 영하 40도의 시베리아 냉기가 한반도를 삼켰다. 대구, 경북에서 영하 15도의 수은주를 구경하게 될 줄은 몰랐다. 돌풍이 불어 체감 온도는 그 이하였다. 편관(
이 술잔에 둘레가 없었다면나는 입술을 갖다 대고 술을 마실 수 없었겠지그래, 입술에 둘레가 없었다면나는 너를 사랑할 수도 없었을 테고사랑하지 않는 사람하고 같이 술 마실 일도 없겠고술잔 속에 보름달이 뜨지도 않겠지저 보름달에 둘레가 없었다면아무도 찐빵을 먹겠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그래, 찐빵에 둘레가 없었다면그 뜨거운 찜통 속에서 부풀어 오르다가멈추어야 할 때를 잊어버렸을 걸그렇다면보름달이란 무엇인가찐빵이 하늘로 솟아올라 둘레를 갖게 된 것인가[감상] 정월 보름날을 대보름, 상원(上元)이라고도 한다. 옛날에는 대보름이 설날보다 더
대한 지나 입춘날오던 눈 멎고 바람 추운 날빨간 장화 신은 비둘기 한 마리가눈 위에 총총총 발자국을 찍는다세상 온통 한 장의 수의에 덮여이승이 흡사 저승 같은 날압정 같은 부리로 키보드 치듯언 땅을 쿡쿡 쪼아 햇볕을 파종한다사방이 일순 다냥하게 부풀어내 가슴 속 빈터가 확 넓어지고먼 마을 풍매화꽃 벙그는 소리들린다, 참았던 슬픔 터지는 소리하얀 운판을 쪼아 또박또박 시 쓰듯한 끼의 양식을 찾는 비둘기하루를 헤집다 공친 발만 시리다아니다, 잠시 소요하듯 지상에 내려요기도 안 될 시 몇 줄만 남기면 되는오, 눈물겨운 노역의 작은 평화여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씨뿌리는 이십대도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선택할 끈이 길지 않다는 것도 안다방황하던 시절이나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쭉정이든 알곡이든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땅바닥에 침을 퉤, 밷어도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
산에는 산길들에는 들길물에는 물길바다에는 바닷길하늘에는 하늘길땅에는 찻길, 인도, 골목길손바닥에도 길이 있다손금이라는 길눈에도 길이 있다눈길이라는 길새들에게도 길이 있다바람에게도 길이 있다인공위성에도 길이 있다길을 잃어버리면 큰일난다.[감상] 시에서 ‘길’은 ‘물 위나 공중에서 일정하게 다니는 곳’을 뜻한다. 새와 바람, 인공위성뿐이겠는가. 삼라만상 ‘길’ 없는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길이 있다. 나의 길과 너의 길은 다르다. 스티브 잡스의 가장 유명한 연설, “Stay hungry, stay foolish!”처
나이 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 흘기며 숟갈 싸움하던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몸에 한세상 떠넣어 주는먹는 일의 거룩함이여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는 더운 목숨이여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풀어진 뒷머리를 보라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감상] 우리는 모두 ‘독거노인’이라는 종착지를 향해서 간다
바닷가에 왔드니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바닷가는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감상] ‘구붓하고’는 몸을 조금 구부리고, ‘지중지중’은 생각에 잠겨 천천히 걷는 모양, ‘개지꽃’은 연분홍의 갯메꽃, ‘쇠리쇠리하야’는 눈이 부시다, 라는 뜻이다. 시인 백석이 자신의
사랑이 올 때는 두 팔 벌려 안고갈 때는 노래 하나 가슴속에 묻어놓을 것추우면 몸을 최대한 웅크릴 것남이 닦아논 길로만 다니되수상한 곳엔 그림자도 비추지 말며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 것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아예 하지도 말며확실한 쓸모가 없는 건 배우지 말고특히 시는 절대로 읽지도 쓰지도 말 것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버리되엎질러진 물도 잘 추슬러 훔치고네 자신을 용서하듯 다른 이를 기꺼이 용서할 것내일은 또 다른 시시한 해가 떠오르리라 믿으며잘 보낸 하루가 그저 그렇게 보낸 십년 세월을보상할 수도 있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을
수련 꽃잎을 꿰매는 이것은 별이 움트는 소리만큼 아름답다공기의 현을 뜯는 이것은 금세 녹아내리는 봄눈 혹은물푸레나무 뿌리의 날숨을 타고 오는 하얀 달일까오늘도 공기가 휘어질 듯하게 풍경을 박음질하는장마전선은 하늘이 먹줄을 튕겨놓고 간 봉제선이다댐은 수문을 활짝 열어 태풍의 눈에 강줄기를 엮어준다때마침 장맛비는 굵어지고, 난 그걸 풍경 재봉사라 부른다오솔길에 둘러싸인 호수가 성장통을 앓기 전,빗방울이 호수 가슴둘레를 재고 수면 옷감 위에 재봉질한다소금쟁이들이 시침핀을 들고 가장자리를 단단히 고정시킨다흙빛 물줄기들은 보푸라기의 옷으로
국밥집 할머니가밥과 고기가 든 뚝배기에뜨거운 국물을부었다가 따랐다가부었다가 따랐다가예닐곱 번그렇게부었다가 따랐다가부었다가 따랐다가…….국밥이이팝꽃처럼환하게 되살아났습니다.아무도입 데지 않는따뜻한 국밥이 되었습니다.[감상] 토렴은 밥이나 고기, 건더기 따위에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 따랐다 하며 먹기 좋게 데우는 것을 말한다. 나는 예전부터 국밥을 좋아했다. 특히, 돼지국밥을 좋아한다. 이번에 부산에 가서 항정국밥을 먹었는데 별미였다. 초등학생 딸아이도 돼지국밥 한 그릇을 다 비운다. 식성(食性)이 닮아서 식구(食口)인가. 딸아, “아무
지난 일들은 모두 잊어버리라고내 몸에 다디단 기름을 발라 구우며그대는 뜨겁게 속삭이지만노릇하게 내 살점을 태우려 하지만까닭 없이 빈 갈비뼈가 안쓰러움은결코,이 빠진 접시 위에 오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님을비틀거리며 쏟아지는한 종지의 왜간장에 몸을 담그고목마른 침묵 속에고단한 내 영혼들이 청빈하게 익어갈 때면그 어느 것도 가늠할 수 없는 두려움에쓰라린 무릎을 끌어안고여기는 에미 애비도 없는서럽고 슬픈 저녁 나라이더냐들풀 같은 내 새끼들서툰 투망질에도 코를 꿰는 시간인데독처럼 감미로운 양념 냄비 속에 앉아나는 또 무엇을 잊어버려야 하며얼
해운대 백사장 여기저기에얼굴들이박혀 있다 지뢰처럼 매설되어 있다머리통만 내놓고 온몸이 모래로 묻힌 사람들……두어 삽 모래 끌어다 얼굴만 묻어버리면주검-영락없이 주검이겠다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모래 속에 누워고요히 명상에 잠긴(오, 주검의 저 평온한 얼굴들!)올 여름에도해운대 백사장엔 인산인해,벌거벗은 비키니 상주들과 문상객들이 어울려웃고 떠들고 마신다 주검 곁에서무더기 무더기 평토제 지낸 음식과 술을 나누고 수박을 쪼갠다어이쿠 이놈의 염천 지옥-잘못 걸어가다간덜커덩,주검의 얼굴을 밟겠다땅 밖으로 불거져 나온 주검의 얼굴을 밟고 기절초
나를 모르시겠지요.갈대나 속대나 싸잡아서배추통만 싹둑 도려내어겨우 밑동만 남은씨도리 배추.두었다가 씨앗을 받으려고내버려 둔배추꼬랑이예요.내가 겨우내 꽁꽁 언 채눈으로 목을 축이며밭에서 견디는 것은내년 봄에노랑 물감 같은장다리꽃을 피우기 위해서지요.왜라니요,꽃을 피우지 못하면살았다고 할 것이 없잖아요.[감상] 씨도리배추는 씨앗을 받으려고 남겨 둔 배추, 밑동을 뿌리에 붙여서 남기고 잘라낸 배추를 말한다. 강원도 여행 중에 눈에 소복이 쌓인 채 버려진 배추들이 밭에 가득했다. 펜션 주인에게 물어보니, 배춧값이 너무 떨어져 차라리 버리는
멀티 플러그를 보는 것 같다선생이 학생을 학생이 학생을 학생이 선생을 선생이 선생을 비집고 들어간다멀티 플레이를 보는 것 같다가해자가 더 길길이 날뛰는 학교에서피해자가 죗값을 낱낱이 받아야 하는 학교에서우리는 죄다 연결될 수 있다우리는 죄다 연결할 수 있다우릴 막 갖다 꽂을 수 있다 여기에 다들어오게 할 수 있다 여기에 다플러그에 플러그에 플러그에 플러그를들어오게 할 수 있다한 사람의 슬픔은 절대로 지구 전체의 슬픔이 될 수 없다발전소 하나가 지구 전체를 밝힐 수 없듯이혼자서 울고 있는 학생이 있다울고 있는 한 가족이 있다지구 전체
너는 한낱 작은 물건에 지나지 않지만내가 이렇게 슬퍼하는 것은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랐기 때문이다너를 얻어 내 품에 지닌 지 27년이 지났단다내가 복이 없어 자식 하나 없고 일찍 죽지 못한 채마음 둘 곳이 없어 바느질에 마음을 붙였단다너는 특별한 솜씨를 가졌으니 물건 중에서도 명물이요철 중에서도 매우 뛰어나구나민첩하고 날쌔며 굳세고 절개가 곧구나여린 동물 같은 부리는 말하는 듯하고또렷하게 생긴 귀는 소리를 듣는 듯하구나고운 비단에 봉황과 공작을 수놓을 때너의 민첩함과 뛰어난 재주는 마치 귀신처럼 아름다웠단다죄 없는 너를 내가 못
수평선이 그어져 있다 그 부분까지 끓는 물을 붓는다 오랜 기간 썰물이던 바다, 말라붙은 해초가 머리를 풀어헤친다 건조된 시간이 다시 출렁거린다 새우는 오랜만에 휜 허리를 편다 윤기가 흐른다 순식간에 만조가 되면 삼분만에펼쳐지는 즉석바다, 분말스프가 노을빛으로 퍼진다 그날도 그랬지 끓는점에 도달하던 마지막 1도는 네가 이유였다 주의사항을 무시한 채 추억의 수위는수평선을 넘나들고 앗, 끓는 바다를 맨 입술로 그날의 너처럼 빨아들인다 그날도 노을빛이 퍼졌다 그 흔적, 바다가 몰래 훔쳐보았다 그 바다에 추억을 데이고, 입안이 까실하다 텅
발버둥 치지 않겠습니다초등학생 때 포항 송도 앞바다에 빠졌을 때처럼더이상 발버둥 치지 않겠습니다당신이 또다시 나를 데리러 오시면그 검은 손으로 내 목덜미를 낚아채시면발버둥 치지 않고 조용히 따라가겠습니다강물은 발버둥 치면서 흐르지 않고꽃은 발버둥 치면서 지지 않고새도 발버둥 치면서 하늘을 날지 않는데죄송합니다그동안 당신이 나를 데리러 오실 때마다밥을 더 많이 먹고사랑을 더 많이 하고 싶어서당신을 따라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 나를 용서해주세요오늘은 발버둥 치는 제 발을 없애버렸습니다먹던 숟가락과 밥그릇과 찻잔도 버리고그곳이 비록 연등
V가 산 하나를 엎고, 힘자랑을 하자W가 감히 나한테 덤벼, 하며 산 두 개를 엎어요H는 뒤집으나 마나 별것도 없다는데X가 산꼭대기에 산을 거꾸로 올리자Y도 바지랑대 위에 산을 덩달아 올려버려요O가 애쓰지 말고 둥글둥글 살자는데도M이 개인기를 키워야 한다며 각을 잡아요[감상] 동시 전문지 2022 겨울호를 읽다가 문봄 시인의 ‘불끈불끈 알파벳’ 동시가 눈에 쏙 들어왔다. 찾아보니 ‘와글와글 알파벳’이라는 다른 알파벳 모양을 갖고 쓴 동시가 또 있다. “I / - 내가 파르테논 신전 기둥이었잖아.” 알파벳을 의인화,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