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묻은 이곳은 돌밭이었다 오이 딸기 주렁주렁 열리던, 감자꽃 쇠뜨기 바랭이 돌날에 찔려 징징거리는 날 이끌고 심으신 감나무 일천만사 아버지의 속울음 같은 구름 뭉실뭉실 흘러간다 아셨을까 아버지, 알아채신 걸까? 안아 올려 감나무 아래 세워 놓으신다 붉은 홍시 떨구어 주신다 살아생전 척박하기만 했던 아버지의 한 바닥 밭 고스란히 내게로 넘어 왔음을 뼈아프게 주워드는, 고랑속! 돌소리 자글자글하다 그 양반 세상에 부리신 건 두 눈 멀뚱한 자식뿐 아니지요. 첩첩 돌밭 같은...
사람들 가슴에 텅텅 빈 바다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깊게 사무치는 노래 하나씩 있다 늙은 돌배나무 뒤틀어진 그림자 있다 사람들 가슴에 겁에 질린 얼굴 있다 충혈된 눈들 있다 사람들 가슴에 막다른 골목 조선낫 하나씩 숨어 있다 파란 불꽃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후두둑 가을비 뿌리는 대숲 하나씩 있다 오늘은 '텅텅 빈 바다'였다가 내일은 '깊게 사무치는 노래'를 부르고 '겁에 질린' 채 '충혈된 눈'으로 '막...
한 판 붙자 심심하면 앞에서 이 쪽 저 쪽 길을 막고 툭 하면 뒤에서 모르는 척 가방 끈을 잡아당기고 인사동 노점길에서도 효자동 은행나무 길에서도 똑같이 건들거리며 햇살을 빨아먹고 달빛을 핥아먹어 내 눈을 멀게 하고 네 귀를 닫게 하는 그 것과 한 판 붙자 좁은 길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광장으로 나가 제대로 붙어보자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맞서기보다는 피하는 게 이런 저런 흉한 꼴 안보고 사는 거라고 입...
언뜻 보아 그 집 사내 별 볼일 없겠다 생각되지만 일찍이 어린 손끝으로 익힌 수선 솜씨 하나 참으로 기막혀서 가랑이 쭉 찢어진 바지를 맡기듯 겨드랑이 함부로 터진 잠바를 맡기듯 세상 때 가득 절어 벌써 뻣뻣해진 목덜미와 함께 쉽게 일그러지는 내 밤들도 둘둘 말아서 맡겨보고 싶다 큰길들이 자꾸 골목을 낳는 이유는 지쳐 너덜거리는 마음 데리고 들고 싶은 곳, 훌쩍 눈물 훔치며 기대고 싶은 곳들이 거기 살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아쉽고 헐거운 자리가 서로를 ...
잡아도 잡아도 멸하지 않는다 하여 멸치라 했다 한다 그렇다면 연보랏빛 오월의 라일락나무들도 멸치다 유월, 담벼락에 온통 줄도장 찍는 줄장미들도 멸치다 그때마다 자궁 속 다시 나오고 싶은 여자도 멸치다 그 밤마다 치마 속 다시 들어가고 싶은 남자들도 멸치다 저 파닥이는 흰구름도 빗물도 빗물 적시는 먼지도 무엇이든 다 매만진다는 세월도 추억도 다들 단도처럼 반짝이는 멸치다 당신이라는 세상, 그 수상한 것만 빼면 나도 멸치여요. 그러니까 ...
백 대쯤 엉덩이를 맞은 암소가 수렁논을 갈다 말고 우뚝 서서 파리를 쫓는 척, 긴 꼬리로 얻어터진 데를 비비다가 불현듯 고개를 꺾어 제 젖은 목주름을 보여주고는 저를 후려 팬 노인의 골진 이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그 긴 속눈썹 속에 젖은 해가 두 덩이 오래도록 식식거리는 저물녘의 수렁논 상처는 매만지는 이의 것, 도톨도톨한 아픔을 물끄러미 쓰다듬다보면 당신에게 백 대쯤 맞아 멍들어 솟은 내 가슴도 그만 무너지고 맙니다. 원망이나 ...
자주 가던 소주 집 영수증 달라고 하면 메모지에 '술갑' 얼마라고 적어준다. 시옷 하나에 개의치 않고 소주처럼 맑게 살던 여자 술값도 싸게 받고 친절하다. 원래 이름은 김성희인데 건강하게 잘 살라고 몸성희라고 불렀다. 그 몸성희가 어느 날 가게문을 닫고 사라져버렸다. 남자를 따라갔다고도 하고 천사를 따라 하늘로 갔다는 소문만 마을에 안개처럼 떠돌았다. 어느 하늘 아래 살고 있는지 몸 성히 잘 있는지 소주...
외환위기, 금융위기 그리고 재정위기 등은 경제주체들이 우왕좌왕하다가 통제불능시 한 순간에 핵폭탄 터지듯 터져버리는 공통점이 있다. 1997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외환위기, 1998년 러시아의 대외채권에 대한 지불유예 그리고 2008년 가을 뉴욕 월가의 빛나는 별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을 신호탄으로 한 금융위기의 엄습 등이 모두 그랬다. 1998년 여름 러시아의 외환과 재정위기로 촉발된 모라토리엄 시엔 미 대형 해지펀드인 롱텀 캐피털 매니지먼트가 파산하면서 미국경제의 더블 딥 침체를 예견케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유교경전...
폭풍한설에 풍경소리마저 얼어붙은 겨울 산사에서 온밤을 통째로 우는 건 문풍지뿐이다 문의 틈새를 살고 있으나 사실은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이다 솜이불이 깔린 따뜻한 아랫목에 몸을 누이고 바람 타는 생을 마감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바람이 멈추고 울음을 그쳐도 문풍지는 문풍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차라리 바람에 온몸을 치미는 것이, 몸부림치며 우는 것이, 살아있는 이승의 시간인 것을 안이어도 안 되고 밖이어서도 안 되는 안과 밖의 경계를 살아야 하는...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도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뵌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
저마다 하루치의 수고를 닫아 건 캄캄한 골목길 오늘도 우성세탁소 안은 환하다 열린 문 사이로 스팀다리미 뿌연 열기 줄지어 승천하고 세탁통을 둥글게 둥글게 돌아가는데 몸에 맞지 않는 옷 덮고 미싱은 구석에서 말없이 존다 문득 다림판 앞에 서서 구겨진 허물 정성껏 펴는 아저씨 얼굴이 성자 같다 그의 등 뒤로 활짝 펴진 생들이 천정 가득 하늘거리는데 무거운 짐을 펴는 그의 등은 누가 펴줄까 하늘을 보니 별빛 몇 모여 세탁소 간판을 걸었구나 "수고하고 구겨진 자...
봉숭아 꽃잎에 실밥 한 올 앉았습니다 온종일 제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봉숭아 꽃잎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모양입니다 꽃잎과 실밥 그 먼 생의 거리를 좁혀 앉은 오늘 하루를 저희들끼리 즐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어느 나뭇잎엔가 실밥처럼 내려앉고 싶은 내 몸은 너무 무거워 또 이삿짐을 묶고 밤새 뜬눈입니다. 실밥 한 올 같은 가뿐함으로 세상 어느 나뭇잎엔가 홀홀 내려앉고 싶은 봄. 간혹 바람 속에는 깊고 어두운 터널의 노래가 우우 숨어 있기도 하지만, 지는 꽃잎보다 내...
울고 있다 보내주세요 라며 스무 살 조선족 선원이 울고 있다 태풍이 오기 전 바다의 중심에서 너 집은 어디고 라며 경상도 말로 물었다 -중국 길림성이고요 어머니 보고 싶어요 괭한 바다를 덮는 가슴팍엔 귀향길, 꽁치비늘의 번들거림 애처롭다 노란 머리에 성질 난 갈바람이 일어선다 파도가 거칠어지는 바다 -이놈아 자석아 여긴 머나먼 바다다 -북태평양 한가운데다 말이다 만선이 펄쩍 뛰는 마스트에 길림성 눈꽃 같은 똥을 찍 갈기고, 갈매기 탱탱하게 남쪽으로 난다 ...
너무 멀리 와버린 일이 한두 가지랴만 십오 년 넘게 살던 삼문동 주공아파트가 그렇다네 열서너 평 임대에 우리 네 식구 오글리던, 화장실 문 앞에 세 끼 밥상 차려지고 어쩌다 쟁그랑쟁그랑 싸워도 자고 일어나면 서로 코앞에서 얼굴 맞대던, 이젠 쉬 돌아갈 수도 없는 거기, 마음의 집 위태로울수록 죽기 살기로 새끼들 품었지요. 쟁그랑쟁그랑 다툼이 일어도 소박한 밥상머리 둘러앉으면 우리식구 꽃잎이었지요. 행여 토라져 돌아누워도 등은 절로 맞닿...
아버지 기일 앞둔 그믐날 수수밭 스친다 바람도 없는데 수수 흔들린다 시나브로 어둑해진 하산길 어디, 먼데서 꽹과리 소리 가슴까지 차오르는 샛강 건널 때 또렷하게 들려오는 어머니 다듬이 소리 새이불 한 채 지어 두고 어머니 절에 가신다 수수알이 흔들린다 바람도 없는데 어머니 수수보다 더 흔들리신다 부부로 산다는 것. 그 무슨 연유로 어찌 묶였기에 저리 풀릴 줄 모르는 걸까요? 분명 한 번도 사랑한다 말하지 않았을 아버지의 명료한 부재가 올해도 ...
내 어머니는 분명 한쪽 눈이 먼 분이셨다 어릴 적 운동회 날, 실에 매단 밤 따먹기에 나가 알밤은 키 큰 아이들이 모두 따가고 쭉정이 밤 한 톨 겨우 주워온 나를 이것 봐라, 알밤 주워왔다! 고 외치던 어머니는 분명 한쪽 눈이 깊숙이 먼 분이셨다 어머니의 노래는 그 이후에도 30년도 더 넘게 계속되었다 마지막 숨 거두시는 그 순간까지도 예나 지금이나 쭉정이 밤 한 톨 남의 발밑에서 겨우 주워오는 내 손목 치켜세우며 이것 봐라, 내 새끼 알밤 주워왔다! 고 사...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바깥은 요란해도 아버지는 어린 것들에게는 울타리가 된다. 양심을 지키라고 낮은 음성으로 가르치신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들이다. 가장 화려한 사람들은 그 화려함으로 외로움을 배우게...
7시간 수술 끝나고 어머니 환자복 갈아입히며 어머니 흰 젖가슴 꼬집어본다 다시 시집가도 괜찮겠다는 아이 서넛 그 젖으로 키우겠다는 쉰 넘은 아들의 농담에 아직 풀리지 않는 전신 마취 속에서 이내 얼굴 붉어지는 어머니 아름다워라! 어머니라는 이름의 저 사랑스러운 여자 열여덟 봄날 가시내를 따라갈 꽃 있을까마는 고 가시내 굳이 몸 안에 몸 심어 내뱉고는 '어머니'란 이름 얻었습니다. 받침도 없이 홀 가벼운 그 이름 하나 받아 안고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
속을 가진 것들은 대체로 어둡다 소란스레 쏘삭이고 속닥이는 속은 죄다 소굴이다 속을 가진 것들을 보면 후비고 싶다 속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 속을 끓이는지 애를 태우는지 속을 푸는지 속을 썩히는지 속이 있는지 심지어 속이 없는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다 속을 알 수 없어 속을 파면 속의 때나 딱지들이 솔솔 굴러 나오기도 한다 속의 미끼들에 속아 파고 또 파면 속의 피를 보기 마련이다 남의 속을 파는 것들을 보면 대체...
그래, 너 좋을 대로 좋은 사람 잘난 사람 다 만나고 나 같은 놈일랑 한 삼사십 년쯤 후 내가 푹, 쭈그러지면 그때라도 만나주거라 그리움이 끝에 이르러 더는 길이 보이지 않을 때 터져버린 후련한 망말, 그러나 여전히 뜨거운 말. 영원히 기다리겠노라는 새털처럼 가벼운 말도 못해 곪은 응어리. '한 삼사십 년쯤 후/내가 푹, 쭈그러지면' 물론 너도 푹, 쭈그러지겠지만 그때까지 불씨 남겨 두었다가 후후 불며 일으킬 용기 장담하며 가는, 그 또한 사랑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