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은 단순한 고기잡이 어항(漁港)이 아니었다. 포항은 고대부터 큰 항구였다. 많은 인재가 큰오기라 불린 영일만(迎日灣)으로 해서, 일본 당시 왜(倭)로 떠났다. 일본 땅은 농사가 잘되고, 나무가 잘 자라고, 숱한 강물을 따라 흘러 내려오는 사철(砂鐵)도 풍성했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그 넓고 풍요한 논밭을 갈아 벼 심고 거두는 법을 왜인들에게 가르쳤고, 사철을 강물에서 건져 불에 녹혀 두드려 칼·도끼·화살촉 등을 만들어 짐승을 잡는 법도 가르쳤다. 이렇게 수많은 인재가 일본에 건너가 땅을...
시가현엔 '연오' 본 뜬 '여고' 호수도 있었어 서기 157년 연오랑 日 망명 효고켄서 긴 칼 '기비' 제작 연오랑 세오녀 내외는 2세기의 포항에 실지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연오항(延烏郞)은 신라 제4대 석탈해왕(昔脫解王)의 손자였고, 세오녀는 연오랑왕자의 왕자비(王子妃)였다. 이처럼 오래된 고대인의 이야기를 소상히 알 수 있는 것은 고대사(古代史) 이야기를 소상히 적어 남긴 역사학자들 덕분이다. 또한 연오항 세오녀라는 한국인 왕손 남녀를 각별히 존경하고 사랑한 일본인 서민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 한국인 내외는 ...
연오랑이 日 가져간 보물 8종 효고켄 이즈시진쟈에 모시고 연오랑 아내 받든 신사도 있어 日 역사 문건 '고사기' 등엔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 비교적 많이 서술돼 있어 동해 바닷가 즉, 영일만가에 연오랑(延烏郞)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을 때-서기 157년 무렵, 신라 제 8대 아달라(阿達羅)왕 시절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연오랑은 이날 바다에 나가 해초(海藻) 를 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위 하나가 나타나더니 연오랑을 등에 싣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바위를 타고 온 연오랑을 본 일본 사람들은 범...
신라 제2대 남해왕(南解王) 때 일이다. 가락국(駕洛國) 바다 한가운데에 어떤 배가 와서 멈추었다. 이것을 보고 그 나라의 수로왕(首露王)이 백성들과 함께 북을 치고 법석을 피우며 그 배를 맞으려 했으나 배는 계림(鷄林)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의 아진포(阿珍浦) 쪽으로 달아났다. 이 때 마침 포구에 아진의선(阿珍義先) 할멈이 있어 달아나는 배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할머니는 박혁거세왕(朴赫居世王)의 고기잡이 할멈이었다. 할멈이 배를 보며 말했다. "이 바다 가운데에는 바위가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까치들이 모여들어 우는...
杞溪. 포항시 북구 기계면의 한자 글씨다. '杞(기)'는 고리버들을 뜻한다. '溪(계)'는 골짜기를 뜻하는 한자. 이 두 한자의 뜻을 통해 기계면은 일찌기 고리버들이 우거진 골짜기 동네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조(朝鮮朝) 전기(前期)의 대표적인 지리지(地理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신라 제35대 경덕왕(742~765년)대에 대대적인 토지 정비가 있었으며 고려 때 지어진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地理)편에도 경덕왕이 전국의 지명을 손본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여기에 기계 이름도 나온다. "기계현...
포항시 흥해읍에는 천곡사(泉谷寺)라는 절이 있다. '석천(石泉)'이라는, 돌 샘의 명성으로 알려진 절이다. 신라 제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은 피부병으로 오래 고생했다. 천곡사의 샘물이 피부에 좋다는 신하의 권유를 따라 흥해 천곡령에 와서 멱을 감았더니 신기하게 나았다고 한다. 고마움의 뜻으로 여왕은 자장율사(慈裝律師)로 하여금 그곳에 절을 짓게 하고, 이름을 천곡사( 또는 영곡사) 라 했다는 것이다. 이 절은 6.25 전쟁 때 불타고 요즘은 그 후에 지어진 새 절이 자리잡고 있다. 경내에는 돌로 테두른 ...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박목월 작사, 김성태 작곡의 명가곡 '이별의 노래'의 '구만리'가 바로 포항 호미곶의 구만리라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이 애절한 노래(박목월 시인은 실제로 포항 호미곶 구만리에 가서 이 노래를 지었다)를 따라 구만리(九萬里)를 찾았다. 길게 해안이 이어지고 작은 집들 지붕 어깨 너머로 보리밭과 시금치 밭이 펼쳐진다. ...
포항의 주산(主山) 운제산(雲梯山) 기슭에 신라 제 26대 진평왕(眞平王·572~632년) 때 지어진 오어사(吾魚寺)의 원래 이름은 항사사(恒沙寺)였다. '항사(恒沙)'란 '길게 이어지는 모래 벌'을 뜻한다. 포항 바닷가의 긴 모래벌을 가리킨 한자(漢字)낱말이다. '긴 모래벌이 이어진 바닷가 포항에 지어진 절'이라는 뜻에서 이같은 이름이 붙여진 듯 하다. (일설에 의하면 '바닷가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이 출세했다'해서 '항사사'라 했다는 설도 있다.) 어떻든 당시의 포항은 일본으로 이어지는 항구로서 큰 구실을 하고 ...
청산별곡이라는 고려(高麗)가요가 있다. 자연에 돌아가고자 한 이의 간절하고 아름다운 노래다. “살리라 살으리랏다. 청산에 살으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으리랏다.…” 포항시 북구 청하면(淸河面) 덕성리 기청산식물원 이삼우(李森友)원장은 이 '청산(靑山)'은 '이상향(理想鄕)을 가리킨다고 보고 있다. 자신이 경영하는 식물원은 바로 이 '청산' 즉 유토피아를 꿈꾸는 고장이라 소개도 한다. 1964년 서울대학교 농과대 임학과(林學科)를 졸업, 인연이 있어 기청산식물원을 열게 되었다. 1990년의 일이다. ...
"신광(神光). 비학산 아래 이 드넓은 들판은 일찍이 대단위 제철(製鐵) 공장 터였다"고 하면 좀처럼 믿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영일 냉수리신라비(迎日冷水里新羅碑)의 비문을 살뜰히 읽어보면 그 사실이 영락없이 드러난다. 고대의 제철은 강모래 속에서 거두어 올린 사철(沙鐵)을 원재료로 썼다. ①이 사철을 진흙으로 빚은 가마솥에 넣는다. 여기에 얄팍하게 구운 숯 조각을 함께 보탠다. ②이 숯 조각에 불을 붙여 72시간(사흘 밤낮) 내내 불 땐다. ③사철이 가마솥 속에서 깨끗이 녹으면 불 때기를 그만두고 흙가마 속의 무쇠가 ...
포항시에서 국보(國寶) 두 개가 발굴됐다고 하면 놀라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 중 하나는 1989년4월 포항시 북구 신광면(神光面) 냉수리(冷水里)의 언덕바지 밭에 묻혀있었던 '영일냉수리신라비(迎日冷水里新羅碑)'요, 또 하나는 2009년5월 포항시 북구 흥해읍 학성리에서 발견된 '포항중성리신라비(浦項中性里新羅碑)'다. 영일냉수리신라비는 당시 '최고로 오래된 신라비(新羅碑)'라 하여 우리나라 고고학계(考古學界)의 비상한 주목을 받았는데 , 이 냉수리 신라비보다 연대가 약간 앞서는 것으로 보아지는 중성리신라비를 또...
'신라 천년(千年)의 수도였던 경주 즉, 서라벌은 인구 백만의 대도시였다'고 하면, 곧이듣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전성기의 신라 서라벌에는 17만8천936호나 되는 호구(戶口)가 있었다고 밝혀져 있다. 한 집에 식구가 다섯 명이 살고 있었다 해도 당시의 서라벌 인구는 90만이 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8세기의 그 옛날에 한 집의 식구수가 다섯만 되었겠는가. 이 무렵의 당(唐)나라의 수도 장안(長安)도 백만 도시였었다. 장안과 나란히 백만 인구의 대도시를 누린 신라 서라벌에는 금입택(금으로...
수로(水路)부인은 신라 최고의 미인이다. 강릉(江陵) 태수(太守)인 남편을 따라 부임지로 가는 길목에서 철쭉꽃이 핀 험한 산을 바라다보며 저 꽃을 꺾어 내게 줄 자가 없는가 하고 묻는다. 그러나 그 곳은 올라갈 수 없는 곳이라며 모두들 고개를 젓는다. 이 때 소를 끌고 가던 노인이 나타나, 대뜸 산에 올라 꽃을 꺾어와 바치며 노래까지 읊는다. 이 노래가 유명한 신라 향가(鄕歌) 14수(首)중의 하나인 헌화가(獻花歌)다. '노인헌화가' 라고도 하는 노래다. 아무도 오르지 못하는 산에 순식간에 올라가, ...
1세기, 포항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여성이 있었다. 신라 제2대 남해왕(南解王·서기 4~24재위)의 왕비 운제부인(雲梯夫人·雲帝夫人이라고도 함)이다. 열나흘밤의 달처럼 환한 미인이었다는 이 여성은, 포항의 진산(鎭山·그 고장을 지켜준다는 산)인 운제산(雲梯山)에 살고 있었다. 가뭄이 들면 항상 기우제를 주관했고, 이 산에서 산출되는 숫돌 제조를 관장한 실력자이기도 했다. 숫돌은, 칼 도끼 화살 농기구 등 고대의 각종 철기(鐵器) 제조에 반드시 필요로 했던 주(主) 자원이었다. 조선조 제9대 성종(成宗) 때 편찬된 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