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선(경주초등학교 교사)

‘50갑의 성냥을 만들 정도의 인, 못 한개에 해당하는 철분,딱총의 화약종이에 칠할 만큼의 칼륨, 닭장 하나쯤은 새햐얗게 칠할 정도의 석회’.

미다스 데커스의 ‘시간의 이빨’에 나오는 얘기다. 사람이 살다 간 흔적을 어찌 화학적 질량으로 측정할 수 있을까마는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다. 주어진 시간 속에 살다 가지만 어떤 이는 누구나 흠모하는 일생을 살다 가고 또 어떤 이는 잊고 싶은 존재로 살다 기억에서 사라져 간다. 살아서 악역을 많이 했다면, 나쁜 기억을 지닌 채 오래 기억되기보다 차라리 빨리 잊혀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요즘은 몸도 마음도 시간의 이빨에 먹혀드는 느낌이다. 야금야금 뜯어 먹히는 것이 아니라 한 입씩 움쑥움쑥 베어 먹히는 듯하다. 늙음은 찬란한 아름다움이라고 했던가? 거울 앞에 서 있기가 민망할 정도로 늙음이 어둠살처럼 찾아든다. 시간이 내 안으로 성큼성큼 제 집인 양 걸어 들어와선 나갈 생각을 않고 턱하니 자릴 잡고 있다.

일몰이 가까워지면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것처럼 사람의 일생도 아름답게 끝났으면 좋겠다. 난 아직 늙음을 당연처럼 받아들일 준비가 덜 되었나 보다. 태어나는 것도 축복이요, 다음 세대를 위하여 자리를 비워주는 일도 슬픔이 아니라 은자의 황혼처럼 아름답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별의 시간이 오면 누구나 아쉽고, 가고 나면 또 그리운 게 인지상정이라지만 요즘은 생각이 자꾸만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것 같다.

줄기세포 논쟁이 가라앉는 가 싶더니 또 수면 위로 떠오른다. 후손들에게 더 나은 것을 물려주고 싶겠지만, 부끄러운 유산은 물려주지 않는 게 선구자의 길이다. 내 자식들에게 물질적인 유산을 물려주려 애쓸 게 아니라, 튼튼한 정신적 지주를 남겨주고 가야할 때인 것 같다. 어른도 아이도 다들 흔들리고 있다. 다들 어딘가에 조금씩 중독이 된 듯하다.

우리가 미덕이라 여겼던 것들이 어느 순간인가부터 옛 시대의 유물처럼 눈앞에서 와해되어 가고 있다. 은근과 끈기가 미덕이던 시대는 지나가고, 모두가 조금씩 제자리를 이탈해 혼돈 속에서 좌충우돌한다. 시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면 굳이 복고풍으로 무너진 건물을 복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신적인 와해는 사상누각을 방불케 한다. 오래 살려고 애를 쓸 게 아니라, 어떻게 살다 가느냐? 그 질을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요즘은 텔레비전이나 신문 보기가 겁날 정도로 사람 사이의 거리가 수습을 못할 정도로 벌어지고 있다.

부모가 남긴 물질적인 유산이 형제간의 갈등을 낳고 싸움의 불씨가 되고 영영 등 돌린 채 남보다도 못하게 살아가고 있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벼랑까지 내 몬 것일까? 돈만 있으면 의식주 해결되니 가족도 친척도 이웃도 안중에 없다.

누구 뒤에 줄을 서야 하는 지도 누구 옆에 방석을 놓아야 하는 지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가난한 시인 아버지는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다 간 자신의 일생을 유산으로 남긴다고 했다. 정말 깊이 있는 말이다.

요즘 아버지의 모습은 어른들의 모습은 스스로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휘청거리고 있다. 황사 바람 속에서 길 찾기를 하던 젊은이들도 나이 들면 어느 새 싫다고 거부했던 그 길을 가고 있다.

위인전 속의 인물보다, 가난하지만 열심히 사는 부모님을 존경한다는 자식의 말이 먼 이야기처럼 들린다. 물질적인 부를 좇아가거나, 입시전쟁을 치르면서 어른도 아이도 무엇을 잃어버리는 줄도 모른 채 단절되어 가고 있다.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니 잃은 줄도 모른채 무감각해져 버렸다.

자연에 순응하며 말없이 열심히 살다 가신 부모님이 문득 그립다. 나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준 어린 시절은 가난해도 따뜻했고, 또한 행복했던 날들이다.

‘공부 좀 해라.’가 대화의 전부가 되어버린 일상생활 속에서 물질적인 풍요는 누리게 해 준다지만, 과연 우린 내 아이에게 어떤 부모인지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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