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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춘추전국시대는 중국 역사상 가장 다양한 사상이 출현하고 영웅호걸들의 무용담이 많았던 다이나믹한 시기였다. 허베이성(하북성)과 산시성(산서성)의 경계를 이루는‘중국의 그랜드캐년’이라 불리는 곳이 타이항산맥(태항산맥)이다. 타이항산맥은 열자(列子)‘탕문편(湯問篇)’의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고사로 유명한 산맥으로 산둥성과 산시성을 나누는 기준이 되는 산이다.

산둥성에 위치한 제나라의 환공은 관중이라는 걸출한 재상을 만나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로 등극했다. 이후 춘추 5패(제 환공, 진 문공, 초 장왕, 오 부차, 월 구천) 가운데 두 번째 패자가 된 인물이 산시성에 위치한 진(晉·기원전 1042년~기원전 369년)의 문공(文公·재위 기원전 636~기원전 628)이다. 문공의 부친인 헌공은 제 환공의 딸로부터 신생을 얻고, 적(狄)나라 여인에게서 딸 하나와 중이와 이오를 얻는다. 딸은 나중에 진(秦)의 목공에게 시집간다. 헌공은 여융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공주를 취해 여희에게서 혜제(奚齊)를, 소희에게서 탁자(卓子)를 낳았다. 그러나 여희의 계략에 의해 태자 신생이 죽고 여희의 소생인 해제를 태자로 세우자, 결국 문공 중이(重耳)는 적나라로 망명하고, 이후 제나라, 조, 송, 정, 초, 진(秦)나라 등으로 이동하면서 장장 19년이라는 망명의 길에 오른다.

중이가 망명할 당시 나이는 43살이었으며, 중이를 따르는 인물은 외숙부인 호언(狐偃)과 가신인 조최(趙衰), 선진(先軫), 개자추(介子推), 가타(賈佗), 위추(위무자), 호숙(壺叔), 전힐(顚詰), 구계(臼季), 호모(狐毛), 가륜(賈倫) 등이었다. 

19년간의 문공의 삶의 궤적은 후대인들의 나침반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공자는 “진 문공은 인덕과 신의로서 천하의 패자가 되었다”고 칭송하였다. 진 문공은 즉위 후 논공 행사를 하면서 ‘포상을 못 받은 사람이 있거든 신고하라’고 꼼꼼하게 포고까지 내렸다. 그런데 이런 조치를 대단히 비루하게 여겼던 인물이 있다.

그는 진 문공이 굶주리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여 바쳤다는 ‘할고봉군(割股奉君)’의 일화를 남긴 개자추라는 인물이다. 그는 진 헌공의 자식들 가운데 가장 명민한 중이(重耳)가 군위에 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라 여기고, 정작 그 신하란 작자들이 서로의 공적을 자랑하는 것은 하늘의 공을 탐하는 짓이라며 도적질보다 못하다고 비루하게 여겼다. 바로 여기서 나온 고사가 바로 ‘탐천지공(貪天之功)’이다.

결국 개자추는 노모를 모시고 산시성 진중시의 현급시인 제슈시(介休市, 개휴시)소재의 면산(綿山)에 은거한다. 훗날 진 문공이‘할고봉군(割股奉君)’으로 전심을 다해 자신을 보좌한 개자추(介子推)를 잊은 것을 알고 그를 찾았으나 개자추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진 문공은 산에 불을 지르면 산에서 나올 거라 생각하여 신하들로 하여금 산에 불을 질렀지만 개자추는 끝내 나오지 않고 노모를 감싸 안은 채 산불에 타 죽었다. 소위 포목소사(抱木燒死)의 유래이다. 진 문공은 산불을 낸 것을 후회하고 개자추가 죽은 날에는 불을 피우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그날이 마침 음력 3월을 알리는 청명(淸明)이었고 이것이 바로 한식(寒食)의 기원이 된다. 한식은 동지(冬至) 후 105일째 되는 날이다.

개자추는 노모와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언어는 사람의 됨됨이를 나타내는 치장’이다. 일관성이 없는 언어로 국민을 속이고 일시적으로 상황을 모면하려고 변명과 기만적인 언어로 국민을 속이는 이번 장관청문회의 후보자들과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의 처신들은 국민을 매우 실망시킨 한편의 비극이자 탐천지공이다. 정치지도자들의 현 모습들을 보는 국민의 마음은 개자추와 같이 진정한 충신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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