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절반은 의술이요, 절반은 에스페란토"
··········· 박화종 에스페로 내과 원장10년만에 대학졸업…뒤늦은 박사학위 취득 '晩悟篤志'희망·소망담은 인류 평등, 평화의 언어 평생 전파 꿈꿔

박화종 에스페로 내과 원장

"의사는 생명을 구하는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 생명은 신의 손에 있습니다. 다만 의사는 이웃과 더불어 함께 기뻐하고, 고통을 나누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포항 중심가인 한국은행 포항본부가 있는 오광장과 오거리 중간쯤(포스코건설빌딩 맞은편)에 '에스페로 내과의원'(2층 건물)이란 특이한 이름의 내과 전문 의원이 있다.

포항사람들에게는 '아! 당뇨환자들이 많이 찾는 곳' '친절하기로 소문난 원장' '오래 기다리는 병원'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병원 간호사들에게는 환자보는 시간이 아까워 평소 자장면을 즐겨 시켜 먹는 원장이다.

이 의원의 원장이 바로 '포항의 슈바이처' '한국의 자멘호프 박사'로 불리는 박화종(56) 원장이다.

그는 지난 93년 이곳에서 '에스페로 내과의원'을 개업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에스페로'라는 이름이 무엇인지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대우자동차의 '에스페로'란 이름의 승용차는 개업 한참 뒤인 90년대 초에 출시됐다.

'에스페로'는 국제어인 에스페란토어로 '희망, 소망'의 뜻이다. 그는 지난달 (사)한국 에스페란토협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1920년 국내에 처음 들어온 에스페란토는 안서 김억, 춘원 이광수, 나비박사 석주명, 장충식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이 한국 회장을 엮임했다.

에스페란토는 폴란드 안과의사인 '자멘호프' 박사가 1887년 창안한 국제 공용어로, 1국가 2언어주의를 추구한다. 대부분의 대학들이 '에스페란토' 동호회를 갖고 있다.

'에스페란토'는 박 원장이 평생을 걸고 도전하고 있는 평등, 평화의 언어운동이다.

최근 병원 옆 어느 식당에서 그를 만났다. TV 드라마 속의 빈틈없는 '의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체구가 큰 편인 그는 인터뷰 내내 싱글벌글 웃었다.

편안하고, 인정많은 옆집 아저씨처럼 느껴졌다.

자주 옮겨 다닌 어린 시절

박 원장은 태어난 곳, 자란 곳, 그리고 고향이 각각 다르다. 부산 대신동에서 태어났다. 초등 4학년때부터 대학 졸업(중앙대 의대)때까지는 서울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조상대대로 살던 곳은 경북 청도군 각북면 남산리다. 청도읍내에서 서북쪽으로 승용차로 30여분 걸리는 비슬산 자락의 시골이다.

그는 강원도 양구초등과 적서 초등(파주)을 다니다 졸업은 서울 덕수초등에서 했다. 그리고 서울의 경복중학교와 인창고교를 졸업했다.

군인이었던 부친이 이곳저곳으로 근무지를 옮겨 다녔기 때문. 이때문에 초등학교를 비롯 어릴때 친구들이 그리 많지 않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동기인 육사 2기생이었던 부친(박재열·88년 사망)은 6·25전쟁때 부상을 입기도 했으며 59년에 대령으로 예편, 경북농협지부장을 지낸 후 군납사업에 손 댔다 실패를 맛보기도 했다.

학창시절과 의사의 길

제법 큰 덩치때문에 경복중학교 유도부를 다녔다. 그때 일생에서 가장 친한 친구 2명을 만났다.

가정환경, 꿈, 성격, 고향, 심지어 혈액형까지 달랐다. 하지만 서로에게 삶의 이정표가 되어주는 그러한 친구였다.

한명은 목사, 다른 한명은 기업가, 그리고 자신은 의사가 되었다.

그는 "각각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때로 서로의 잘못을 지적해 주는가 하면 격려도 해주는 그런 친구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원래 축산과나 건축과 진학을 원했다. 심지어 의과대학을 가야 의사가 되는지도 몰랐다.

의대 진학은 부모님의 뜻이었다. 어느날 부친은 그에게 "지금 우리나라는 휴전중인 만큼 기술이 있어야 한다.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것은 정말 좋은 기술이다"라고 말했다. 마음 착한 그는 아버지의 당부에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그는 "저같이 물러터진 사람이 남을 도울 수 있는 의사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정말 잘 한 결정"이라고 말했다.

지난 81년 모 병원 야간 당직때 5살짜리 남자 아이가 숨을 거둔채 병원에 도착했다. 맥박과 호흡, 눈동자 반사도 없어 사망 선언을 하려는 순간, 아이 엄마가 끝까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1시간이상 있는 힘을 다해 심폐소생 시술을 했다. 결국 아이는 기적처럼 회복됐다. 지금도 그때의 기쁨과 인내,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가슴속에 품고 환자들을 대한다고 말했다.

포항 정착과 개업 일화

지난 77년 부친이 포항철강관리공단 전무로 발령받았고 그 역시 대학졸업(81년) 후 공중보건 장학생으로 경주시 보건소장에 발령됐다.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포항에 자연스레 정착하게 됐다.

영남대학병원에서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마친 그는 울릉군 보건의료원장과 기독병원 내과과장을 지냈다.

93년 지금의 에스페로 의원을 개원했고,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포항 기독병원 내과과장으로 있을 때인 92년이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리는 에스페란토 세계대회에 갔다오기 위해 병원장에게 휴가를 요청했다.

서울 에스페란토 세계대회(94년)를 사전 벤치마킹하기 위해서였다. 병원장은 허락을 해주지 않았다.

병원장의 불허 배경에는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에스페란토를 잘 몰랐던 병원장은 '에스페란토를 하는 사람은 빨갱이'로 생각했다.

즉 에스페란토 공부를 좌경화 공부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는 병원장에게 문공부의 허가증까지 보여주며 설득했다. 그러나 병원장은 막무가내였다.

양해를 구한 뒤 비엔나로 떠났다. 며칠뒤 귀국해 병원에 출근했다. 병원장이 내과과장을 구한다는 신문공고를 보여줬다.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을 것 같아 개업을 마음먹었다.

취미는 에스페란토 세계여행

그는 매년 여름 에스페란토 세계대회에 참가한다. 휴가 겸 다양한 사람들을 사귀기 위해서다.

그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만나고 다시 내가 하는 일에 힘이 솟는다"며 "내가 스스로 만든 울타리를 한 번씩 걷어내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는 모든 일을 잊고 싶을 땐 가끔 인터넷 바둑(아마 4단)도 즐긴다.

인생관을 묻자, " '만오독지(晩悟篤志· 늦게 깨닫더라도 뜻을 돈독히 하라)'을 가슴깊이 새기고 있다"고 했다.

"14대 선조중에 퇴계 문하에서 수학한 분이 있었죠. 학문의 깨침이 늦어 한탄할 때마다 퇴계선생은 '만오독지'를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10년만에 대학을 졸업하고, 50이 넘어 박사학위를 받은 저에게 딱 맞는 글입니다. 가훈으로 여기고 마음에 새기고 있죠. 하지만 아직도 그 뜻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슈바이처 박사' 또는 '자멘호프 박사'

그들두고 가끔씩 주위에서는 '슈바이처'라고 한다. '최선의 인술(仁術)이야말로 최상의 의술(醫術)'임을 몸소 실천하는 인물이라는 것.

그는 "울릉도 근무 때 누가 저보고 '슈바이처'라고 하길래 부끄러워 죽는 줄 알았습니다. 영원한 울릉도 의원인 고(故) 이일선선생님께서 웃으실 일입니다. 하지만 슈바이처 박사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겸손해 했다.

그는 12년째 한달에 한번씩 포항시 대보면 석병양로원에 간호사들과 함께 무료 진료 봉사를 하고 있다. 또 '포항모자원'(송도동)과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무료 건강검진도 빼놓을 수 없는 봉사활동이다.

그는 " '슈바이처'보다는 '포항의 자멘호프 박사'라면 또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에스페란토에 대한 열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세계는 좁아지고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단일민족이 아닙니다. 언어는 오늘 우리 옆의 인권문제입니다. 그들에게 우리의 문화를 알리는 것보다 그들의 문화와 언어를 먼저 알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에스페란토는 자국어와 국제어를 함께 사용하자는 운동입니다. 강한 나라는 더 강해지고 약한 나라는 더 약해지는 악순환의 사슬을 끊어주는 열쇠가 바로 에스페란토입니다. 에스페란토는 '그저 하면 좋은 언어'가 아니라 '꼭 해야'하는 인류 평등과 희망의 언어입니다"

"우린 대체 뭐예요"

그는 지난 99년 사비를 들여 고향 각북면에 방치돼 있던 남산서원을 복원해 에스페란토 학교를 만들었다. 이사장에 취임한 후 1년에 2번씩 에스페란토 학교를 열고 있다.

일본 큐슈의 에스페란티스토들과 함께 내년에는 오사카의 에스페란토 모임과 함께 만남도 계획하고 있다.

그는 최근 인터넷 포털사이트인 '네이버'(Naver)의 제 11대 명예지식인으로 선정돼 인터뷰를 했다.

"내 인생의 절반은 의술이요, 절반은 에스페란토"라고 말했다. 그때 부인과 외동 딸(미국 유학중)이 물었다. "그럼 우린 대체 뭐예요"

그가 궁색하게 대답했다. "내가 사랑하는 두 여자, 그 한폭판에 그대들이 있다오"

'포항 생명의 전화' 이사 겸 상담원인 부인 김언정(50)씨는 현재 장애인 복지회관과 북구보건소 등에서 미술치료 강사로 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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