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이 낳고 기른 한국미술사의 거목

장두건 화백

"죽기전에 전시회 한번 더 열 수 있을지…. 현재로선 계획이 없어. 내년 봄, 따뜻한 날 잡아 내가 묻힐 묘터 보러 고향에 내려갈 생각이야"

초헌 장두헌(89) 화백은 포항시 북구 달전면 초곡리에서 태어났다. 일명 '사일'이라고도 부르는 이 마을은 인동(仁同) 장(張)씨 집성촌이다.

그는 국내 서양 화단에서는 나름대로 독보적 위치(특히 사실화)를 점하고 있는 원로로 대한민국 미술협회 고문이다. 포항이 낳은 생존 예술인 중 거목이다.

포항시청사에 걸려있는 '학들의 낙원'

그는 올해 8월 서울 교보문고 강남점 문화이벤트홀에서 졸수(90세)기념 첫 판화전과 자서전 '삶은 아름다워라'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화력(畵歷) 70년만에 판화전은 처음이었다.

또 지난해 6월 포스코가 특별기획으로 포항 본사 갤러리에서 '초헌 화백 미수(米壽· 88세) 기념전'을 열었다. 이때 최근 수년간 혼신의 열정을 쏟아 그린 대작(200호)인 '학들의 낙원'을 전시했다. 이 그림은 현재 포항시청사에 걸려 있다. 나이 90에 아직도 붓을 놓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얼마나 될까.

그는 "화가는 죽는 날까지 붓을 놓아서는 안된다"고 후배들에게 틈만나면 말하고 있다. 그리고 몸소 실천하고 있다.

그를 지난 29일 오전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5거리 제일생명 빌딩 505호 그의 화실(명함에는 '연구실', 본인 스스로는 '놀이터'라 했다)에서 만났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해방 전후의 옛날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는 요즘 매일 옛날 노래를 틀어놓고 작업을 한다고 했다.

화실은 그의 성격을 대변하듯 깔끔하게 정리정돈 되어 있었다.

"종전에는 TV 틀어놓고 작업을 했는데, 보고싶지 않은 장면을 보게 되는 등 방해가 돼 한달전부터 녹음기를 하나 샀지. 옛날 노래를 가만 듣고 있다보면 옛날 고향 생각이 절로 나. 적적한 마음을 달래주고, 가사에는 인생의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어"

깡마른 체구였지만 나이에 비해 목소리는 또렷했다. 노화백은 인터뷰 중 가끔씩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속에서 세월의 무게와 함께 애처로움이 함께 묻어났다.

그는 매일 집(서초구 방배동)에서 승용차(운전기사가 운전)로 오전 10시전에 화실에 도착, 오후 4시쯤 귀가한다고 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던가. 그는 어린시절 고향이야기를 할 때만은 힘이 솟는 듯 즐거워 했다.

10살에 처음 신발 신어

그의 집은 달전에서 손꼽히는 대부농이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형제 등 3대가 한 집안에서 살았다. 부친은 10남매의 장남(장손)이었다. 그 자신도 2남4녀 중 장남이었다.

10살때까지 한학 공부를 하던 그에게 집안에서 흥해공립보통학교 입학 결정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미 입학 나이가 2살이나 지난 뒤였다.

할 수없이 그의 할아버지는 면사무소에서 2살 적게 호적을 만들어 그를 학교에 입학시켰다. 학교 입학을 위해 신발을 사러 할아버지와 함께 맨발로 포항까지 걸어갔다.

난생 처음 검정고무신을 사 신었다. 왜냐하면 그때(10살)까지 머슴들에게 엎혀다니다 보니 신발이 필요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보통학교때 미술선생님 때문이었다.

"이름이 '마예달'이란 미술 선생님이 야외에서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벗꽃을 그리고 있었지. 난 그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고, 나를 본 선생님은 가까이 오라고 한 후 '너도 한번 그려보라'고 했지. 내 그림을 본 선생님은 마음에 드셨는지 칭찬을 해 주셨고, 그때부터 난 미술시간이 제일 좋았어. 얼마후 경성에서 있은 그림공모전에서 입상하는 등 그때부터 난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던것 같아"

꿈 많던 젊은 시절

흥해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삼촌의 권유에 따라 대구 공립상업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조카의 그림 재능을 위한 배려가 아닌 졸업 후 취직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대구상업에서 자신의 그림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상업미술은 대구상업학교의 중요 교과목이었다.

상업 미술 선생은 그의 그림을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할아버지 사망 이후 그의 부친은 집안 일에 무관심했다. 해가 거듭될 수록 집안 가세는 기울어갔다.

결국 대구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본 유학을 위해 20살에 한국을 떠났다. 큐우슈우에 1년간 머물다 동경 태평양미술학교에 입학했다.

"동경미술학교를 가기 위한 기초공부를 위해 태평양미술학교에 다녔지. 2학년때 동경미술학교에 응시, 고배를 마신 후 3일간 하숙방에서 이불만 덮어쓰고 지냈어. 그때 내린 결론이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열심히 해 파리로 가자'였지"

하지만 미술공부에 대한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결국 그는 일본 명치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의 이력에서 명치대학 법학과 졸업이라는 특이한 경력은 이같은 연유에서 비롯 된 것.

그의 작품 세계

그는 1987년 동아대학교 초대 예술 대학장을 끝으로 대학을 떠났다. 그래서 그는 노년에 해당하는 1990년대 이후에 가장 많은 그림을 그렸다. 지금의 공덕동 화실에서 였다.

그는 자신의 그림 세계를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작품할 때 우연이 있을 수 없다. 파고들고 또 파서 석공이 마치 돌을 쪼듯 성실하게 대처한다. 나는 새로이 그리기보다 기존 작품을 마음에 들때까지 고치는 경우가 많다. 작품수가 적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나의 세계를 심도 있게 펴 나갈 것이며, 세파를 의식하지 않을 것이며, 나의 작품세계와 그 가치성을 지키는 것은 오직 나 뿐 일 것이고, 찾는 이 없는 고독의 세계라면 그 또한 숙명으로 볼 것이다"

그는 조명아래에서는 붓을 들지않기로 유명하다. 그 이유를 물었다. 그는 "나는 색채를 중요시하다 보니 불빛 아래에서는 밑그림은 그리지만 물감은 절대 쓰지 않는다"며 "차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요즘 젊은 화가들은 그런 차이조차 모른채 그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학들의 낙원' 또한 이곳에서 꼬박 2년동안 불빛 없이 그렸다고 귀띔했다.

그의 작품중에는 '투계(鬪鷄)'와 '꽃'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다. 특히 '투계'에 대해서는 "어릴때 닭싸움을 많이 봤어. 싸움에서 지는 닭은 영락없이 다음 장날 내다 팔리고 말지. 투계를 통해 인생을 그리고 싶었던 거야"라고 설명했다.

기념비 약속했던 고(故) 손춘익

고향분이나 제자, 후배들이 이곳에 자주 찾아 오는지를 묻자, "고향 후배중에 고(故) 손춘익이 서울 올라 올때마다 화실을 찾아 왔었던데…. 그 친구 죽기전 '선배님, 조만간 고향 어귀에 선배님 기념비 꼭 세워드리겠습니다'라고 약속했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지난해 12월, 포항 환호해맞이 공원에서 시립미술관 건립 기공식이 있었다. 그는 만약 시립미술관 안에 '장두건 전시관'이 만들어지면 자신의 작품과 유품을 전부 기증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다.

그는 현재 미술협회 포항지부 주최로 매년 공모전이 개최될 때 마다 자신의 호를 따 만든 '초헌 미술상' 시상금으로 100만원씩을 내놓고 있다.

장두건 화백 약력

▷1918년 포항시 북구 달전면 초곡리 출생(호적 1920년생)

▷흥해 공립보통학교 및 대구 공립상업학교 졸업

▷일본 동경 태평양미술학교 수학(1937~40년)

▷일본 동경 명치대학 법학과 졸업(1941~43년)

▷프랑스 파리 미술 유학(1957~60년)

▷수도여사대(현 세종대) 미술과장(1960~66년)

▷성신여대 미술대 학과장 및 예술대 초대학장(1967년~84년)

▷동아대학교 예술대학 초대학장(1984~87년)

▷대한민국 미술협회 고문(현)

▷이형회(以形會) 회장(현)

▷서울특별시 문화상(미술) 수상(2003년)

▷대한민국 문화훈장(보관장) 수상(1997년)

▷한·중·일 작가 초대전(1992년)

▷국민헌장 석류장 수상(1984년)

이외 초대전, 개인전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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