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4주년] 조국 독립·재건 의지 담은 한흑구 시 '내 집' 최초 발굴
[광복 74주년] 조국 독립·재건 의지 담은 한흑구 시 '내 집' 최초 발굴
  • 한명수 시인 ·흑구문학연구소 대표
  • 승인 2019년 08월 14일 17시 26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8월 15일 목요일
  •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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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수 흑구문학연구소 대표…1934년 '신한민보' 게재 원본
‘나는 조선의 외아들이노라’고 외치는 우국시인
수필 '보리'의 작가…포항서 생활하다 1979년 타계
고 한흑구 선생. 경북일보DB
고 한흑구 선생. 경북일보DB

자신을 ‘검갈매기’, ‘흑구’라고 이름 붙이고 ‘어느 색에도 물들지 않는 굳센 색, 죽어도 나라를 사랑하는 부표의 색’을 지니고 일생을 살았던 작가. 고국을 떠나 미국 유학 생활 경비를 고학으로 마련하고, 흥사단 단우로서 생활비의 일부를 조국 독립 활동을 위한 자금으로 내어놓았던 청년 한흑구.

“시 한 줄에도 나라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고백하며, 미주 한인 사회에서 애국심 깊은 글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했던 그가 어머니의 위독한 소식을 들은 것은 1933년 가을이 무르익을 때였다.

당시 흥사단에서 주요 직무를 맡고 있었던 아버지 한승곤 목사와 귀국 문제를 의논한 끝에 집안의 장남인 한흑구가 먼저 귀국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흥사단의 안창호가 윤봉길 의사 의거 때 체포돼 대전형무소에 수감 중이었고, 시대적으로 만주 사변 이후 조국의 더욱 정세가 악화되는 일로 놓인 상황에서 조국의 일을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독립운동가 부자(父子)의 비감한 결정이었던 것이다.

고국으로 돌아오는 배편도 알아보아야 하고, 공부하던 일도 정리를 해야 하고, 흥사단 일도 마무리해야 하고, 교회의 벗들과 형제들, 그리고 미주사회에서 자기가 맡았던 여러 일들도 정리하면서 한흑구는 그동안 썼던 시들의 일부를 미주사회의 한인들에게 선물로 남겨둔다. 그 가운데 1934년 1월, 귀국을 앞두고 조국 독립을 향한 비장한 마음을 담은 시 ‘내 집’을 발표한다.

3연 12행의 시 속에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그려놓은 이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신한민보’(1934. 1. 4.)에 게재된 한흑구의 시 ‘내 집’ 원본.

△‘신한민보’(1934. 1. 4.)에 게재된 한흑구의 시 ‘내 집’ 원본.

내 집은 헐어지고,
뜰 앞은 쓸쓸하노라.
내 집을 두른 성벽은
비바람에 굴러나느라.

과학자는
그것을 ‘자연 도태’라 하고,
내 심장은
비운에 울 뿐이노라!

내 집은 헐어지고
나는 외아들이노라.
헐어지는 내 집을 바로 잡을
나는 조선의 외아들이노라.


- 한흑구 ‘내 집’ 전문(현대어 필자)
 

‘조선중앙일보’(1935. 2. 14.)에 다시 발표한 한흑구의 시 ‘내 집’ 전문.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하여 ‘조선’이라는 글자를 복자 ‘××’로 표기하였다

△‘조선중앙일보’(1935. 2. 14.)에 다시 발표한 한흑구의 시 ‘내 집’ 전문.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조선’이라는 글자를 복자 ‘××’로 표기했다.

‘내 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개인적으로는 고향에 있는 한흑구의 집, 어머니와 누이들이 살고 있는 자신의 집을 말하기도 하지만, 국권을 상실한 민족의 터전, 민족의 집, 즉 ‘조국 조선’을 상징한다. 한흑구는 1남 3녀의 외아들로서 한 집안을 세워야 하고 돌봐야 하는 의무가 있다. 마찬가지로 허물어지는 조국을 세워야 하고 돌봐야 하는 애국심 깊은 조선의 청년이기도 하다. 집안을 돌봐야 하는 마음과 내 조국을 다시 일으켜야 하는 마음을 중의적으로 나타낸 작품이다.

과학자들은 집이 허물어지고 비바람에 성벽이 굴러 내리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하지만, 자기의 심장은 ‘비운에 울 뿐’이라는 한흑구, ‘나는 조선의 외아들이노라’고 외치는 그의 비장함이 가슴을 파고든다.

나의 집, 나의 조국을 그리워하던 ‘조선의 외아들’ 한흑구는 1934년 귀국했다. 그는 어머니를 돌보며 잡지 ‘대평양’을 주재했고, 조선에서 흥사단 활동, 즉 수양동우회 활동을 전개한다. 그러면서 이 작품을 ‘조선중앙일보’에 다시 발표하는데,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조선’이라는 글자를 복자 ‘××’로 표기했다.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 땅에서, 우리 글로, 우리 조국을 기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우리를 슬프게 하는가.

한흑구는 자신의 수필집 ‘인생산문’에 이러한 글자들을 복자로 표기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경험을 서술하고 있는데, 그렇게 해두어도 조선인들은 다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한흑구는 시를 써야 했고, 발표해야 했고, 그렇게라도 조선 청년들과 소통을 해야 했던 것이다. 무엇을 위해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한흑구는 귀국해서도 많은 시와 수필과 평론과 소설을 발표한다. 그리고 ‘백광’을 창간에 참여해 문학운동을 벌이던 중,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피체돼(붙잡혀) 일제로부터 강력한 탄압을 받고,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요시찰 인물’로 지목돼 글을 쓰는 일과 발표하는 일에도 상상할 수 없는 제약을 받았고, 일제로부터 갖은 회유에도 결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시 한 줄에도 나라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우국시인 한흑구는 1945년 광복이 되자 그해 9월 1일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왔다. 이후 서울과 포항에서 생활하다가 지난 1979년 타계했다.

지금으로부터 85년 전에 발표한 시이지만, 그 울림이 오늘에까지도 전해지는 것은 필자 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한명수(시인·문학평론가·흑구문학연구소 대표)
한명수(시인·문학평론가·흑구문학연구소 대표)

그가 귀국할 때 직접 엮어두었던 수 많은 시들은 지금 소실되고, 일부 작품들만 신문과 잡지에서 발견되고 있을 뿐이다. 그 시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하에서 조국에 대한 사랑과 독립을 기원하며 쓴 것들이다. 필자는 그동안 한흑구가 발표한 시들을 정리하는 가운데 많은 작품들이 조국을 걱정하며 쓴 시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흑구는 민족의 자주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독립의 그 날까지 ‘순국’의 마음으로 투쟁했던 시인이었다. 해방 이후 청명하게 빛나는 언어를 바탕으로 시적 수필을 통해 민족 부흥의 정신적 가교 역할을 하며, 정신적 가치의 숭고함을 노래했고 국민 계몽을 위해 문학을 통한 지방과 지역의 문화운동을 선도하는 선구자이기도 했다.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시점에서 한흑구를 우국시인이요 민족시인으로 자리매김하는 일은 우리 문단사의 중요한 일이요 나아가 우리 민족의 정신사와 교육사에도 중요한 일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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