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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 4. 석공예 최고장인 이태만
[명인] 4. 석공예 최고장인 이태만
  • 김윤섭 기자
  • 승인 2019년 11월 17일 21시 45분
  • 지면게재일 2019년 11월 18일 월요일
  • 1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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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덩이가 불상으로'…돌에 생명력 불어 넣는 작업, 언제나 행복
이태만 최고장인이 작업장인 ‘만혜석조원’ 입구에 조성된 대형 약사예좌상의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돌에다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는 생각에서 언제나 행복합니다. 전국 곳곳에 있는 석공예를 두루 섭렵해 관계 전문가들과 문화재적 보존방안도 협의하고 우리 문화의 독창성을 대내외에 알리는 방안과 기술향상에 이바지하고 싶습니다”

경산 하양읍에서 영천 금호읍를 잇는 구길(경산시 와촌면 시천리)을 가다 보면 입구에 대형 약사여래좌상이 조성돼 있는 석공예작업장이 있다. 이곳이 경상북도 석공예 최고장인 이태만(63) 대표가 운영하는 ‘만혜석조원’이다.

이태만 최고장인이 ‘만혜석조원’ 작업장에서 부처님을 수발하는 동자승 작품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석공예의 길.

그리 넓어 보이지 않는 규모 (300여평)의 이곳 ‘만혜석조원’ 작업장은 사방에 돌가루가 흩날리고 똑딱똑딱 망치 소리와 윙~하는 기계음이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이태만 장인은 1956년 대구시 남구 남산동 남문시장에서 어물전을 하던 부모님의 4남 6녀 중 여덟째로 태어나 비교적 부유하게 자랐으나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가계가 어려워지는 바람에 14세 때 무작정 상경했다.

당시 서울에서 일반석공일로 생계를 이어가는 맏형에게 의탁해 3년여 동안 형의 일을 도우다가 생계에 대한 절박함으로 석조기술을 배우기로 뜻을 굳히고 5~6년간 전문기술자를 찾아다니며 석조기술을 익혔다.

어린 나이에도 자신과의 싸움에서 끝내 굴하지 않고 노력한 결과, 당시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동산석건’에서 그의 끈기와 기술능력을 인정해 발탁되면서 석공예의 길에 인생에 미래를 걸기로 했다.

우연한 인연으로 만났던 전 홍익대학교 전뢰진 교수는 석공예 길을 걷게 하는 길라잡이가 됐고, 또 그의 사사로 그가 설계한 십장생도를 받아 석공예로 재현해 생명력을 부가한 작품이 서울세종문화회관 별관 내부기획 작품으로 선발되는 쾌거를 거두는 등 돌과의 인연이 서서히 작가의 반석에 오르게 됐다.

이 일을 계기로 1983년 당시 전국 최대의 석재가공회사인 충청북도 음성군의 평곡산업(주)에 돌일 직종 기술자가 월급 27만 원을 받을 때 이들의 보수의 2배에 해당하는 몸값(월급 55만 원에 상여금 별도 조건)에 당당히 공예주임으로 스카우트 됐다.

그해 입사 작품으로 처음 강원도 고성군에 있는 건봉사 적멸보궁 주변의 석조물 제작을 맡은 계기로 주로 석공예 부문에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 결과 1985 ‘제5회 노동문화제’에서 공예부문 입선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비록 나는 배운 것이 없지만, 그것이 항상 나를 낮추는 자세가 됐고, 학력보다 기술로 승부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내 좌우명이 ‘땀이 아니면 성공은 없다’가 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그의 결심과 노력이 1992년 기능공들의 최고 인증서인 문화재수리기능자등록증(문화재관리국장)을 당당히 취득하는 계기가 됐다.

그때부터 석공예 전문가로서 독창성과 기술개발을 위해 1989년 3월, 현재의 자리에 ‘만혜석조원’이라는 간판을 건 석공예 연구공간을 열어 그동안 앞만 보고 열심히 연구하며 작품활동에만 전념해 왔다.

그러다 보니 남들처럼 작품전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어떠한 수상도 욕심을 내지 않은 채 지난 반평생 오직 석공예 작품활동에만 외길인생으로 채찍질, 그동안 수백에 달하는 작품을 전국 곳곳에 남겼을 뿐 그 흔한 상과 실용등록하나 변변히 갖추지 못했다.

“항상 부처님 얼굴만 다듬고 석탑을 깎고 석등을 새우니 자식들이 모두 반듯하게 자라고 성공한 것 같다”며 남들이 부러워한다. “앞으로도 당당히 석조공예인으로서 부끄럼 없이 돌과 생을 함께 할 것이다”고 다짐했다.



△신기술 개발과 사회적 봉사.

석공예 인으로서의 신기술 개발은 생명과 같은 일이다. 따로 스승을 정해 기술을 익히지 않고, 스스로 국내 유수의 석공예장을 두루 섭렵하면서 나만의 노하우를 길러 왔던 것이 나의 석공예 부문의 독창성이다.

이것이 1985년 제 5회 노동문화제 공예부문 입상자로, 또 1992년 조각공(석) 부문의 문화재수리기능자등록증 자격 취득하는 계기가 됐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동안 신기술 개발을 위해 불교미술 부문에도 다양한 형상의 조각을 연출했고, 그 묘사 기법도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새로운 기법을 과감히 도입해 세계 공예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노력해 왔으며 문화재 보수사업에 있어서도 원조성자와 호흡을 같이하는 기법을 과감히 시도함으로 작품의 생명력을 부가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해 왔다.

수많은 문화재 현장답사와 관계자들과의 기술연찬 결과 오늘날 내가 있게 했고, 이러한 기술 연마를 위해 전국 곳곳에 문화재를 찾아 본인의 기술연마와 아울러 사회봉사적 차원의 단순 보수 등에 적극 참여해 왔다.



△후진 양성을 위한 노력.

후진 양성은 장인들의 희망사항이요, 꿈이다. 다행히 사업장이 있는 경산시는 대학이 운집한 학원도시인 데다 이 중 3개 대학에 조소과가 개설돼 있어 해마다 현장실습을 참여하고 있다.

지난 2000년부터 인근 대학교 조소학과 학생 등 2~3에게 기술을 전수하고 있지만 후진양성을 위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하고자 하는 의지 부족으로 떠나가는 학생들을 볼 때 현실적인 어려움이 없지 않다.

공공기관 등에서 공예품을 발주할 때 종합건설에 묶어 입찰을 보기 때문에 도급받은 회사들이 작품성 보다는 수익성을 따지다 보니 값싼 중국산을 선호하는 바람에 목공예나 석공예가들이 설 자리가 없다.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조언자 역할이라도 꾸준히 하고 싶다.

겉모양은 꼭 같지만 속 내용이 다르다. 나는 최대한 하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1000년을 바라보고 작업 해왔다. 30여 년 전에 납품한 곳에서 하자 없이 잘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들을 때 그 한마디가 보상이고 내 자존심이다.
이태만 ‘만혜석조원’ 대표가 이철우 경상북도지사로부터 2018년 경상북도 최고의 장인 인증패를 받고 있다.
△앞으로 숙련기술자로서 활동계획.

경상북도 최고장인은 기능인들의 희망이요 꿈이다. 경상북도 최고장인이라는 그 명예와 의무에 걸맞게 석공예 부문의 기술혁신과 문화재 보수 및 우리나라의 석공예 발전의 신기술 개발에 최선을 다할 각오다.

지속적인 기술 연찬으로 석공예 도록 발간 등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 석공공예 기술을 전승 보존함은 물론, 산업화 세계화 추세에 걸맞은 독창성을 개발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천명하는 새로운 기술개발에 주력하고 후진 양성을 위해 보다 적극적인 방법을 찾겠다.
이태만 만혜석조원 대표 가족(오른쪽부터 본인, 부인, 딸, 아들 등)이 딸 효정양의 박사학위 수여식을 마친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기술전수 및 후진양성을 위해 작업장을 현대화하는 체계적인 매뉴얼을 개발, 누구나 쉽게 석공예에 접할 수 있는 기회와 자신감 부여, 우리 고유의 전통 석공예의 전통 맥을 잇는 데 이바지하고자 한다.

이태만 경상북도 최고장인(석공예)은 “장인을 인정해주는 취지는 좋은데 근본적인 해결이 안 되니까 목조각이나 석공예가들이 생활고에 버티지를 못한다. 관공서에까지 싸구려 제품이 밀려들어 가는 걸 볼 때는 안타깝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또 “독학하듯이 배운 나만의 노하우를 후배들과 공유하고 싶은데 일거리가 없어 배우던 제자들까지 떠나는 실정이다. 누구나 손쉽게 우리 문화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방안 등을 적극적으로 모색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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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섭 기자 yskim@kyongbuk.com

경산, 청도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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