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근래에 각 기관이나 학교, 회사 사무실 등을 방문하면 안내표지판에 탕비실(湯沸室)이란 패찰을 보게 된다. 언뜻 생소한 느낌이 들었지만 어림짐작으로 비서실에서 오는 손님에게 다과를 대접하려고 물을 끓이고 간단한 과일이나 과자를 준비하는 곳인 것 같다.

차를 끓이거나 찻잔을 씻는 공간이리라. 끓일 탕(湯), 끓일 비(沸) 아주 생경하게 느껴졌었다.

손님 접대를 위해 다과를 준비하고 설거지하는 공간을 고상하게 표현하여 탕비실이라 하는 것이라고 짐작은 간다.

내가 직장 생활을 할 때는 들어보지 못했던 단어인데, 시청에 가면 시장 비서실 옆에도 붙어있고, 학교에 찾아가도 교장실 부근에, 회사에 가면 사장 비서실 옆에 붙어있어 좀 고상한 말인가 보다 여겼지만 아무래도 나에겐 낯이 설다.

찾아보니 ‘탕비실’이라는 순수 우리말은 없는 것 같다.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건물에서 공공연히 쓰이고 있다. 국어사전에 없는 한자어 아니 일본어의 잔재로 보이는 말인데 모두가 쓰고 있다. 어떤 건물에는 청소도구를 갖추어 놓은 곳에도 탕비실이란 표지판을 붙인 곳이 있다.

탕비의 비(沸)를 설비의 비(備)로 착각한 것인가?

낯이 선 한자나 일본식 단어가 고상해 보였기 때문일까? 일본말로 물 끓이는 주전자를 ‘ゆわかし [湯沸(か)し]’, 가스온수기를 ‘순간탕비기(瞬間湯沸器)’라 부르는 등 ‘탕비’란 단어가 쓰이고 있으니 일본식 한자어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차를 마시며 유난히도 까다로운 ‘다도(茶道)’를 중시하는 일본에서는 회사나 공공기관에 대부분 차를 우리기 위해 물을 끓여 보급하고 또 찻잔이나 접시 등을 씻을 수 있는 공간을 두는데 이런 공간을 탕비실이라 부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기관장의 집무실 곁에 두어 비서들이 차를 준비하는 공간을 탕비실이라 했고, 화장실 곁에 두어 청소도구를 보관하거나 대걸레를 빨기도 하는 공간을 탕비실이라 부르는 곳이 있었다.

차를 준비하는 곳과 청소도구를 보관하는 곳은 완전히 다른 공간인데 같은 이름을 사용하다 보니 혼란스러운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아직 공사판의 자재(資材) 명칭에 일본어가 그대로 쓰이고 있다. 차가 고장 나서 카센터에 가면 일본 용어를 많이 들을 수 있고, 건축공사 현장에 가면 공구의 명칭이나 자재의 길이 및 두께의 단위 같은 용어에 일본어가 일상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편리하게 의미를 전달할 수 있고, 그런 용어를 써서 일의 능률이 올라간다면 외래어로 받아들이고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나친 피해의식으로 세계 모든 말은 돼도 일본어는 안 된다는 의식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특히 일제 강점기를 살아보지 못한 정치인들이나 사회지식층의 사람들이 오히려 과거사를 들춰 친일파를 가려낸답시고 떠들고, 국민을 편 갈라 싸우게 만드는 현실도 이제그만 했으면 싶을 때가 있다.

해외여행 탓인지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중국어 몇 구절을 자랑삼아 구사하는 예를 많이 본다. 그러나 탕비실 같은 말과는 다르다. 외국어도 아닌 국적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전에도 없는 일본식 한자어가 버젓이 사용되는 이유는 이 용어가 법률에 나와 있기 때문이란다. 건축 관련 법률 조례 등에 ‘탕비실’의 설치 규격, 안전관리 사항 등의 내용이 나오는데 이를 따라 ‘탕비실’이란 용어가 일반 건물에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직장인들이 차 한 잔 마시고 즐겁게 일을 하기 위한 정이 담긴 공간, 그런 곳을 다과실, 정나눔실, 간이조리실, 준비실, 다용도실 등으로 부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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