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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근대미술사] '전설적인 화가' 황술조
[경북·대구 근대미술사] '전설적인 화가' 황술조
  • 박경숙 큐레이터·화가
  • 승인 2020년 01월 14일 21시 43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1월 15일 수요일
  • 1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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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미술사 빛내주는 보물 같은 수작에 자긍심 느낀다
황술조
황술조

‘뇌섹남’ ‘요섹남’. 요즈음 시대에 최고의 매력남을 일컬어 말하는 용어이다.

명석하고 섹시한 두뇌의 소유자, 그리고 요리를 잘하는 남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에다 수려한 외모와 패션 감각이 뛰어난 남자라면 오늘날 최고의 남자라 평가된다. 경주 출신 화가 황술조는 이 모두를 겸비했다.

화우였던 김용준(1904~1967 화가·미술사학자)은 황술조(黃述祚)를 이렇게 회고했다. “토수는 다방면의 취미를 가져서 우리가 눈도 뜨기 전에 그는 혼자서 제주도에서 구해왔다는 추사 선생의 글씨를 걸어 놓고 즐겨했고, 불상의 수집과 감상에도 일가견을 가졌던 것 같다. 그리고 다도에 깊은 취미를 갖고 조원(造園)한 재주와 화초 기르는 재주는 비상했다. 일반 목공예의 재주도 놀라왔으나 특히 요리를 만드는 데는 능숙했다. 그는 손수 치킨라이스를 만들어 내는데 일류 양식점의 그것보다 훨씬 맛이 좋은 데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매너·전통예술애호·화초·목공예·요리·패션 여기에다 외모·그림 등 재주를 가진 황술조를 김용준은 ‘경주사람으로서 아마 우리가 아는 범위의 화가로서는 가장 격이 높은 사람이었을 것이다’라고 평했다.

아무튼 1930년대의 황술조는 매력남 중에 최고의 매력남이었고 시대를 앞서가는 모던보이 였다. 이러한 인물이 35세에 요절했으니 그가 남긴 모든 것이 신비로움과 안타까움의 베일에 싸여져 한국미술사에서는 애석해 하는 작가다.
 

구룡포 소견.포항시립미술관 소장.

1930년대 황술조가 구룡포 풍경을 한점 남겼다. 그는 여유와 자유분방한 성격이 낳은 격조 높은 예술관을 구축했으며, 풍부한 표현적 수법과 독특한 해석 능력이 탁월한 작가로 한국미술사에서 평가되고 있다.

황술조는 대대로 한방의원이면서 백석이나 수확을 거두는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 상경해 양정 고보를 마치고 도일해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개성의 호수돈고등여자보통학교와 개성상업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했지만 5년 정도밖에 못하고 ‘화인’으로 돌아왔다. 아마도 자유분방한 성격인 탓으로 형식에 얽매이고 자유를 통제받는 고충을 참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후 서울로 돌아와 작품제작에만 몰두하다가 고향으로 내려왔다. 양조장을 하는 개방적인 성향을 가진 형의 도움으로 화업에만 전념할 수 있었는데 이 시기에 비교적 작품을 남길 수 있었다. 시대가 비록 일제하에 어려운 때라 해도 그렇게 생활고에 시달릴 필요 없이 그저 낚시나, 여행 등으로 풍류 인생을 영위하는 삶을 살았다.

안압지.개인소장.

황술조의 나이 35세, 그의 짧은 생애에 제작했던 소수의 작품과 그와 관련된 모든 자료는 희소성의 가치가 크며, 귀한 만큼 찾는 사람들에게 신비한 매력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초상 사진들을 보면 오늘날 소위 K-pop의 주인공처럼 수려한 외모와 패션 감각은 현재의 글로벌 패션 감각에도 뒤지지 않는 다재다능한 예술가로서 손색이 없다. 이러한 황술조가 우리지역 ‘구룡포 소견’풍경을 남겼다는 사실은 우리지역으로서는 굉장한 행운이고 포항미술사를 빛내주는 보물 같은 작품이다.

경주 감포는 황술조의 외갓집으로 어릴 적부터 자주 놀러 가고 방문한 곳이었다. 김영식(황술조 외손자)씨가 감포 인근에 위치해 있는 구룡포에 황술조가 자주 방문했다는 말을 한 것으로 보아 ‘구룡포 소견’도 외갓집에 여행차로 들르면서 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구룡포 소견’ 작품은 1930년대 구룡포 항이 풍요로울 때의 분위기의 멋과 맛을 자아낸다. 신선한 고래고기의 육질과 큼직한 무와 대파를 넣어 시원하고 감칠맛 나게 우려낸 국처럼 ‘구룡포 소견’은 황술조가 그린 풍경화 중에서 회화의 맛을 가장 진하게 느끼게 해 주는 작품이다.

일본 유학시절 신문화와 낭만을 체험했던 황술조에게는 일본에서의 추억을 잊지 못했을 거라 생각된다. 당시 1930년대의 구룡포는 일본인들이 구룡포로 건너와 부를 이루며 정착해 살았고, 일본 동경에서의 번화가 못지 않은 화려한 전성기를 누렸던 시기이다. 물 반, 고기 반일 정도로 어획량이 풍부해서 집집마다 엄청난 부를 자랑했고 화려한 유흥가를 비롯해, 최신식 일본인 가옥들이 즐비했다. 세련되고 자유분방한 황술조가 서울에서 낙향한 후, 경주보다는 번화가인 구룡포가 자유로웠을 것이고 또한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추어 일본 유학시절의 추억을 되살려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술을 좋아하는 황술조가 구룡포가 유흥을 즐기기에 딱 좋은 안성맞춤의 장소이었을 것이고 상당한 매력을 느꼈으리라 추측해본다.

윤범모(국립현대미술관장)는 “황술조의 삶에 있어서 술이 차지하는 몫은 무시할 수 없다. 한마디로 지독한 호주가였다. 한번 마셨다 하면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술집에서 살며 온몸을 술독에 담갔다가 나올 정도였다고 했다고 한다” 또한 화우인 김용준은 “토수는 술을 즐겨 하기를 태백(太白) 부럽지 않게 했다. 자그마한 키와 날씬한 몸에 까무잡잡한 코밑 수염을 기르고 언제나 웃는 얼굴로 친구를 무척 좋아했다. 조선서 동경까지 가는 동안 그는 술로서만 배를 채우다시피 하는 대음(大飮)이었으나 술로 해서 실수하는 일이 결코 없었다.” 라고 했다. 그의 사망 이유가 후두 결핵으로 전해져 오고 있으나 술병으로 죽었다는 설도 있을 만큼 술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글에서 1936년 경주로 낙향한 황술조는, 외갓집인 감포 옆에 위치한 동해안 최고의 번화가였던 구룡포를 자주 찾았을 것으로 짐작되고 엄청난 술을 마셨을 거라는 가공된 추측을 해본다. 비록 연관된 자료는 발견되지 않지만 풍류를 즐기던 황술조가 단지 화가로서 예술적 성취감을 위해 구룡포를 찾았을 것이라는 것에는 수긍되지 않는다.

‘구룡포 소견’ 작품 한 점으로 약간은 억지적인 추측을 해보고 싶은 이유는 △황술조의 작품이 워낙 희소성으로 인해 한국화단에서는 귀하게 여기고 △무엇보다도 ‘구룡포 소견’ 작품이 황술조 사후 80여 년이 가깝도록 묻혀 있다가 포항시립미술관에서 주최했던 ‘영남의 구상미술’전시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는 것에 주목한 것이다. 이러한 일면은 ‘구룡포 소견’의 작품 소개로 한국근대미술사를 두텁게 하는 일에 보탬이 될 것이고, 또한 빈약한 포항 근대미술사에서 인문학적 스토리를 만들어 나가는 데에 우수한 문화자원으로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상상하는 것은 개개인의 자유이고, 이 일로 인해서 황술조와 ‘구룡포 소견’의 작품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에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한다면, 또 다른 문화 창출에 기여가 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예술은 상상을 기본으로 해 무궁무진한 세계를 열어 보여주는 정신적 산물이다. 가공된 이야기든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든 어떠한 이유이든 간에 훌륭한 작가와 작품을 알리는 데 유익한 일에는 틀림이 없기 때문에 무리수를 쓰는 것도 유용한 일일 것이다.

‘구룡포 소견’의 작품은 딱 한 번만 보아도 수작이다. 탄탄한 구성미와 풍부한 표현적 채색으로 회화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몇 번의 터치로 작은 캔버스에 절벽 아래에 아기자기한 어촌마을의 이미지를 내려다보는 시각으로 담아내었다. 마치 큰 그림을 보는 듯한 시원스런 구도와 표현주의적인 붓질, 그리고 절묘한 붓 터치의 조화, 생명력 있는 리얼한 색채에서 대작에서 소화할 구도와 감동을 작은 캔버스에 그대로 담았다. 몇 점 되지 않은 황술조의 풍경 작품에서 보기 드문 수작이며, 그의 작품이 일괄성 없다는 평도 있지만, 황술조의 격조 있는 예술세계를 오롯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생계에 구속받지 않는 황술조는 그림 그리기에 크게 매달리지 않았다. 출세에도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고 선전 출품은 물론, 개인전에도 관심이 없었다. 화우인 김용준은 “토수는 이렇게 다양한 긍(亘)한 재주를 가진 탓인지 그의 그림에도 항상 성광이 빛났다. 그러나 유감인 점은 토수는 몹시 게을러서 좀처럼 그림을 그리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기술을 발휘해 주지 못한 채 가버렸다”고 했다.

이러한 황술조의 성향을 보면 ‘구룡포 소견’ 작품은 예술적 성취를 위한 작품이기보다는 여행지에서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그림을 그리는 그 시간에는 삶을 관조하는 마음으로 제작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아무튼 근대기에 격조 높은 최고의 멋쟁이 화가가 우리 지역을 배경으로 작품 하나를 남겼다는 사실은 감사한 일임은 틀림없고, 문화유산적 가치를 가진 작품을 소장 하고 있음에 지역민들은 자긍심을 가져도 충분할 것이다.

박경숙 큐레이터·화가
박경숙 큐레이터·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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