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규 문학평론가
한정규 문학평론가

안동에는 조선시대 1501년에 출생 1570년에 세상을 뜬 성균관대사성 유학자이자 문신인 퇴계 이황이 긴 호흡을 하고 있다.

그런 안동에 금계라는 마을이 있다. 그곳 금계마을을 검은 언덕, 검제 또는 금지, 금제, 금음지라 부르기도 하며 그 지역은 천 년을 쇠하지 않은 땅이란 의미에서 ‘영원히 쇠하지 않은 땅’이라 한다.

얼마 전 퇴계 선생과 운산 이휘재 선생의 후손으로 서울에 거주한 전 한빛방송 대표였으며 사단법인 안산학연구원 이사장 이필상 경영학박사가 안동 금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금계에서 17세기 이후 김학봉 선생을 비롯해 많은 인물이 태어났다 고 했다.

이필상 박사는 금계 등에 학봉 선생을 비롯한 독립유공자 등 각계각층에 많은 인물이 있다며 학봉과 관련된 김진의, 김병탁, 김준모, 김윤모, 김병동, 김세동, 김현동, 김원식, 김동식, 김화식, 김규현, 김삼록 이상용, 이준형, 이병화, 이만도, 이중섭 김홍락 등 70명을 지칭했다.

이같이 경상북도 안동에는 퇴계 이황 선생을 비롯한 유교 성리학자며 종교철학자로 성균관대사성을 지낸 인물 등이 많기도 하지만 일제식민지시대에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남녀 1천여 명이 독립운동을 했던 전국 어느 지역 못지않은 곳이었다. 뿐만아니라 학문의 고장으로 의를 그 무엇보다 중시하는 자랑스러운 고장이다 라 했다.

이필상 박사 말에 의하면 금계마을은 영산이라 하는 학가산 남쪽 야트막한 천둥산 아래에 있으며 그곳엔 학자도 많지만 구국인물이 많다고 했다. 금계출신 중 대표적으로 학봉 김성일 선생을 말할 수 있다 며 학봉 선생에 대해 소상히 이야기를 해주었다.

학봉 김성일 선생은 1538년 임하 천전리 내암마을에서 청계공 김진 선생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학봉은 어렸을 때부터 어렵게 사는 사람을 돕는 일이 남달랐다. 뿐만 아니라 머리가 영특 여섯 살에 효경을 배웠으며 열아홉 살에는 퇴계 이황 선생의 문화생으로 수학을 했다. 한다.

그때 퇴계 선생이 김성일을 이르기를 행실이 고상하고 학문은 정밀하니 나는 김성일에 비길만한 사람을 대하지 못했다. 라며 칭찬했다고 한다. 학봉 김성일은 1565년 그의 나이 28세 때 퇴계 선생을 모시고 산천을 돌아다니며 시를 읊고 깊은 깨달음과 감흥을 주고받았을 뿐만 아니라 선생을 극진히 모셨다 한다.

퇴계 선생이 서당에서 연말을 보내고 1월에 학봉에게 도통 전수의 징표로 ‘요임금은 공경하셨고 순임금은 한결같았으며 박문약례 두 가지를 모두 지극하게 하였으니 도통의 바른 맥을 이었도다.’ 라는 병명을 손수 써 주셨다. 한다. 그 병명을 학봉은 평생 가슴에 새기고 심학의 도통으로 이해하고 학문의 길로 삼았다 한다.

학봉의 학문성향을 굳이 이른다면 그는 심학과 예학이 중심이라 했다 한다. 학봉의 스승인 퇴계 이황 선생이 1570년에 저 세상의 부음을 받고 이 세상을 떠나자 서울 학봉 선생 자택에 모여 퇴계 선생 빈소를 차리고 곡하며 퇴계 선생의 서거에 대한 애도를 하기도 했다 한다.

그리고 5년 후인 1575년 7월 도산서원을 새로 건축 학봉이 도산서원을 찾았다 한다. 그 시간이 마침 늦지 않은 밤이었다. 퇴계 선생을 모시고 공부했던 도산서당에 퇴계 선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빈 뜰에 벽오동나무 그리고 푸른 대나무만 달빛 아래 쓸쓸히 서 있었다.

스승을 뵙고 싶은 간절함에 눈물이 얼굴을 적셨다. 생전의 선생 모습을 떠 올리며 시 한 수를 읊었다.

- 저녁 구름 떠 있는 가 유정문은 닫혀 있고/ 사람 없는 뜨락에는 달빛만 가득 하네

/ 천길 높이 날던 봉황은 어디로 날아가고/ 벽오동과 푸른 대나무만 해마다 자라는 가-

퇴계 선생의 후손인 이필상 박사가 전하는 영원히 쇠하지 않은 땅 이야기를 들으면서 안동에 대한 또 다른 면모를 알게 됐다. 안동 한지로 만든 탈을 쓴 하회마을 별신굿 그 굿판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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