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조선시대 지방 수령 중에 과천 현감은 서울이 가깝고, 세수(稅收)가 많고, 중앙 고관을 접촉할 기회가 많아 영전하기 좋은 요직이다. 어느 과천 현감이 서울로 영전하여 떠나게 되자 아전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떠나는 날 아침이 송덕비 제막식이다. 비문에 “금일송차도(今日送此盜). 오늘 이 도둑이 떠난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현감이 껄껄 웃으며 “명일래타적(明日來他賊) 내일 다른 도적이 올 것이다”라고 한 줄 더 넣었다. 현감의 인간미가 느껴진다. 기가 막힌 아전들이 “도둑이 끝없이 오는구나(此盜來不盡).” 지나던 과객이 한 술 더 떠 “세상이 온통 도둑이다(擧世皆爲盜).”라 새겨 넣었다는 이야기. 웃음이 나온다. 풍자 속에 장난기의 여유가 느껴져 홀로 웃었다.

김상용 시인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시에서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라고 표현한 마지막 연은 이 시의 가장 함축적인 부분으로 작가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담겨 있다. 삶의 의미를 묻는 물음에 잔잔한 웃음으로 답하는 모습은 삶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우러나온 초월과 달관의 경지를 담고 있다. 남이 몰라줄지라도 자연과 더불어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혼자만의 즐거움을 나타낸 웃음. 조용하고 맑은 웃음일 것이다.

홍관희 시인의 시 ‘사는 법’. “살다가 사는 일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길을 멈춰 선 채 달리 사는 법이 있을까 하여 다른 길 위에 마음을 디뎌 보노라면 그 길을 가던 사람들도 더러는 길을 멈춰 선 채 주름 깊은 세월을 어루만지며, 내가 지나온 길 위에 마음을 디뎌 보기도 하더라. 마음은 그리하더라.” 웃음이 나온다. 사람살이가 다 그렇고 그렇구나 싶어서 나오는 웃음이다.

다산 정약용의 시 독소(獨笑). “양식이 있으면 먹을 식구가 없고, 자식이 많으니 굶주림이 있으며, 높은 벼슬아치는 멍청하고, 재주 있는 인재가 재주 펼칠 길이 없다. 완전한 복 갖춘 집이 드물고, 지극한 도는 쇠퇴하기 마련이며, 아비가 절약하면 아들이 방탕하고, 아내가 지혜로우면 남편이 어리석다. 보름달 뜨면 구름 자주 끼고, 꽃이 활짝 피면 바람이 불어댄다. 세상일이란 다 이런 거다. 나 홀로 웃는 까닭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세상일에 대한 비관적인 깨달음이다. 자조적인 웃음이다. 그렇다 싶어 나도 따라 웃는다.

요즘 세상을 살면서 홀로 웃을 때가 많다. 어쩜 세상 돌아감이 예나 지금이나 같아서 우습다. 서로 헐뜯는 모습도 우습다. 대통령이 되고 싶은 사람이 이처럼 많은 것도 우습다. 웃는 것이 짜증 내는 것보다 좋게 보일지는 모르겠다. 촛불을 밝혀 들고 혁명을 했으면 뭔가 달라져야 하는데, 달라진 것이 하나 없다. 정권을 재창출하겠다는 사람들이나 기필코 정권을 교체하겠다는 사람들이 모두 우습다. 거짓말 같다. 자신의 권력욕에 함몰되어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사람들 같다. 웃기는 일이다.

‘소가 웃을 일’. 너무 기가 막히거나 어이없을 때 ‘소가 다 웃을 일’이라는 말을 쓴다. 웬만한 일에는 흔들림 없이 묵묵히 일하는 소다. 세상일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소까지 웃을 일이라는 것이다.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란 말도 쓴다. ‘지나가는 개’라는 말은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은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무관심 상태의 개, 하등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개도 웃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웃음 전도사도 있고, 웃음 치료사도 있다. 소문만복래. 웃으면 복이 온다. 웃어야 한다. 소도 웃고, 지나가던 개도 웃고, 나도 그냥 혼자 웃고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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